소개글
최치원의 문학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Ⅰ. 序論
Ⅱ. 本論
1. 재당시기 최치원의 문학
2. 귀국 후의 문학
3. 은거와 유랑 시기의 문학
Ⅲ. 結論
Ⅳ. 參考文獻
본문내용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하여 한반도에 수용된 것으로 보이는 한자와 한문은 이후로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중국의 선진문명을 받아들이는 매개 수단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삼국의 언어생활과 문학 활동의 방면에서 중심적 표기체계로 자리 잡게 된다. 초기에 서사적 기능 위주로 외교문서나 금석문 따위의 공적인 방면에 활용되던 한자, 한문의 역할은 남북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다양하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때마침 황금기를 맞이하던 당나라의 문학은 이에 큰 자극을 주어 신라 조정에서는 해마다 많은 견당(遣唐) 유학생을 중국에 파견하여 난숙한 한문화(漢文化)를 흡수·수용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남북국 시대 한문학의 전개 과정에서 빈공제자(賓貢諸子)와 최치원(崔致遠)의 문학에서 절정에 이르며, 이 시기를 대표하는 문학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최치원의 문명(文名)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동방 한문학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며, 그의 『계원필경(桂苑筆耕)』이 남아 있고 『동문선(東文選)』 등에 그 시문(詩文)이 전한다.
<중 략>
885년(헌강왕 11년), 최치원은 당 희종(僖宗, 재위 873~888)의 조서를 가지고 신라로 귀국했으며, 신라의 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은 그를 당에 보내는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는 시독(侍讀) 겸 한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으로 등용하였다. 귀국한 이듬해에 왕의 명령으로 ‘대숭복사비명(大崇福寺碑銘)’을 쓰게 되는데, 이를 비롯하여 지리산(智異山)의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만수산(萬壽山)의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희양산(曦陽山)의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의 4가지를 꼽아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 하였다. ‘대숭복사비명’만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대숭복사비명 大嵩福寺碑銘
가위의 자비로운 부처님 / 迦衛 慈王
우이의 밝은 태양 / 嵎夷 太陽
서토에 출현하고 / 現于西土
동방에서 돋았도다 / 出自東方
참고 자료
三國史記
三國遺事
韓國民族文化大百科
全唐詩』 所載 唐人贈新羅人詩 硏究 : 羅末麗初 漢詩의 再照明을 위하여, 김보경,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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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계원필경(桂苑筆耕), 동문선(東文選), 고운집(孤雲集)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