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양반인구의 증가
2. 서얼인구의 증가
3. 중인의 성장
4. 서민의 경제적 성장
1) 농민의 경제적 성장
2) 상인의 경제적 성장
5. 노비정책의 전환
6. 여성의 지위 변동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조선왕조는 건국한 지 200년이 지나면서 큰 전란을 두 차례 겪었다. 하나는 남쪽에서 일본이 침입한 것(임진왜란)이고, 다른 하나는 북쪽에서 청나라(만주족)가 침입한 것(정묘호란, 병자호란)이다. 임진왜란이 조선왕조의 물질적 기반을 황폐화시켰다면, 병자호란은 정신적 기반을 뒤흔들었다.
7년에 걸친 전쟁은 조선의 국토를 황폐화시켰으며, 7년 동안의 전쟁으로 인하여 조선 인구는 약 100만 명가량이나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 이전에 조선의 인구가 약 800만 ~ 1,000만을 넘지 못했음을 고려한다면, 인구 열 명 당 한 명 이상 사라진 셈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국가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니, 바로 국가 수입의 근거가 되는 자료들이 대부분 분실되었기 때문이다. 토지대장⋅노비대장⋅호구대장 등의 주요 문서들이 대거 사라짐에 따라, 정부는 인구와 토지를 파악하여 세금을 부과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반면에 토지를 보유한 양반 지주들은 오히려 토지와 농민에 대한 사적(私的)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전쟁 중에는 의병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였고, 전쟁 후에는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에 미온적으로 대처함으로써, 토지를 제대로 신고하지 않고 세금을 피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전쟁으로 문란해진 사회질서를 유교적 질서로 다시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갖가지 향규들, 즉 향약(community compacts)을 만들어 향촌사회를 지배하였다.
또한 임진왜란이 끝난 지 30년도 채 안 되어 조선은 또 다른 전란을 겪었는데, 이번에는 북쪽으로부터 만주족이 두 차례 침입하였다(정묘호란, 병자호란). 특히 두 번째 침입인 병자호란 때에 조선의 왕은 만주족 황제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이 국가의 물질적 기반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면, 병자호란은 조선왕조의 정신적 기반을 뿌리 채 뒤흔드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아울러 이러한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양반 지배층이 선택한 타개 방법은 조선후기(17~19세기)사회의 성격을 사실상 규정해 버릴 정도로 한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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