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성리학의 흐름과 전개에 대해
- 최초 등록일
- 2014.01.02
- 최종 저작일
- 2012.05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성리학의 흐름과 수용과정
2. 성리학의 이념과 사상
3. 조선시대 성리학의 전개양상
Ⅲ. 결 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I. 서 론
1289년에 ‘안향’에 의해서 원으로부터 받아들여진 성리학은 고려 후기 신흥사대부인 백이정, 우탁, 권부 등에 의해서 학문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은 휴한법의 극복 등 농업 생산력의 증가를 토대로 성장하면서 중앙관인으로 진출하여 사대부 층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권문세가에 의한 고려사회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원의 복속국이라는 현실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유학은 본질적으로 국가의 경영을 우선하는 치인(治人)의 학문이었다. 이에 반해 성리학은 도덕적 인격함양에 비중을 두는 수기(修己)의 학문이었다. 도덕성과 명분을 갖춘 사람이라야 국가경영의 자격이 있으며, 그들만이 부정, 비리 등 병리현상을 차단하고 국가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대부세력들이 권문세가 정권을 비판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들이 사적인 이해관계에만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적 혼란과 사상적 혼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그러한 총체적 위기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도덕성을 갖추고 공적인 이익을 우선하는 세력으로의 정권교체는 불가피한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특히 사상적인 면에서 성리학은 심성의 수양을 과거의 어떤 전통적 유교보다 철저히 하는 동시에 규범법칙 및 자연법칙으로서의 리(理)를 깊이 연구하여 그 의미를 완전하게 실현하려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존심양성(存心養性)과 궁리(窮理)라는 이론적, 실천적 원리를 근간으로 종래의 유학에서 볼 수 없었던 형이상학적 체계를 구성했던 것이 성리학의 기본 특징으로서, 이러한 체계적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성리학은 강력한 실천적 정치이론으로 전화할 수 있었다.
결국 사림파와 훈구파 사대부 세력이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무장 세력과 손을 잡고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정국을 주도하게 됨으로써 성리학적 개혁의 길은 열리게 되었다.
참고 자료
최우영(2002), <조선 중기 사림정치의 공공성>,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김항수(1994), <조선전기의 성리학>, 한길사
유초하(1996), <관학파․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정초, 조선유학의 학파들>, 예문서원
이완재(2001), <공자에서 퇴계까지>, 이문출판사.
백도근(1994), <화해이념의 형성과 완성 : 선진유학과 주자철학>, 이문출판사
문철영(1984), <조선 초기 신유학의 수용과 성격>, 일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