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기이치vs장제스
- 최초 등록일
- 2013.11.29
- 최종 저작일
- 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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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2.장제스(蔣介石)
본문내용
1864년 지금의 야마구치 현 서부에서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청일 전쟁·러일 전쟁에 참전하였다. 그 후 참모 차장, 하라 다카시(原敬) 내각과 제2차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兵衛) 내각에서 육군 대신을 맡았다. 그는 하라 다카시 내각에서 육군 대신에 오른 뒤, 남작 작위를 받고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장래에는 원수로 촉망 받았으나, 1922년에 중국 상하이를 방문하던 중 황포탄 부두에서 의열단에 의해 암살당할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이후 정계에 뛰어들어 1925년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의 뒤를 이어 정우회 총재가 되었다.
1927년 3월, 제1차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내각의 사직으로 다시금 입헌 정우회 총재 다나카 기이치가 내각을 조성하였다. 그는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재정부 장관으로 임명하고, 다카하시는 일본 전국에 지급 유예령을 실시해 금융 공황을 가라앉혔다. 또한 헌정회 정권 하에서 행해져 온 시데하라 기주로(幣原喜重?) 등에 의한 협조 외교 방침을 전환해 적극 외교로 노선을 변경하였고, 중국에서의 이익과 경제적 이해를 추구하면서 중국에 대한 침략적인 정책을 폈다.
다나카 내각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외교적인 부분이며, 그 중에서도 일-중에 관한 것이다. 상주문은 다나카가 1928년에 쇼와천황에게 올렸다고 하는 상주문(上奏文)이며, 다나카 각서라고도 한다. 문서의 공개는 1929년에 중국측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나, 공개과정의 석연찮음과 문서 작성 상 나타나는 많은 오류들로 인해 위작된 것으로 낙인찍힐 뻔 했지만, 1931년에 발발한 만주사변으로 인해 다나카 상주문의 내용이 맞아떨어지는 것이 확정화하면서 사실상 진본으로 인정되어 버렸다. 게다가 1937년에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 측이 주장하는 위작설은 더 이상 당시의 국제사회에서는 통용되지도 못하였고,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아예 일본판 <나의 투쟁>이 되어버리기까지 하였다.
참고 자료
http://ko.wikipedia.org/wiki/%EB%8B%A4%EB%82%98%EC%B9%B4_%EA%B8%B0%EC%9D%B4%EC%B9%98
http://ko.wikipedia.org/wiki/%EC%9E%A5%EA%B0%9C%EC%84%9D
이병인, 2007, 「國民黨政權의 公民觀과 ‘民族 傳統’ : 革命과 民族 傳統의 交換과 交流」, 『중국근현대사연구』35, 중국근현대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