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호튼 쿨리는 미시건 대학의 앤 아버 캠퍼스 근처에서 태어나 거의 전 생애를 그곳에서 보냈다. 쿨리 집안은 원래 뉴잉글랜드 출신이었으며 1640년 이전에 메사추세츠의 스프링 필드 근처에 정착했던 벤자민 쿨리의 직계 후손이었다. 1864년 쿨리가 태어나던 해에 그의 아버지는 미시건 지방법원의 판사로 선출되었다. 여섯 형제 중 넷째였던 찰스는 쿨리 가족이 이미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앤아버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던 때에 태어났다. 쿨리는 15년동안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렸는데 그 중에는 명백한 정신질환도 있었다. 언어 장애로 고통 받는 수줍고 병약했던 그는 친구가 거의 없었고 공상에 잠기거나 혼자서 책을 읽기를 좋아했다.
쿨리는 대학생활을 7년동안 하였는데 그것은 병과 유럽 여행 그리고 설계 도안과 통계업무에 종사했던 일로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대학 기간 동안 그는 책을 무척이나 많이 읽었는데 이것은 그의 최종 인생경력을 결정짓게 되었다. 1890년 쿨리는 정치경제학과 사회학의 대학원 과정을 위해 미시건 대학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1894년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쿨리는 매우 대단한 자신의 아버지로부터의 압박감이 항상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1890년 미시건 대학 약학교수의 딸인 엘지 존스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로인해 그는 명상적인 생활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쿨리는 1899년 조교수, 1904년 부교수, 그리고 3년 뒤에는 정교수가 되었다. 그는 학부생들에게는 인기가 없었으나 그의 날카롭고 탐구적인 지성에 고무된 많은 대학원생들에게는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쿨리는 오랜 기간에 걸쳐 작성했던 노트로부터 서서히 체계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책을 몇 권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책들은 잘 팔리게 되고 그에게 학계로부터의 명성을 얻게 해주었다.
그는 혼란을 싫어했기 때문에 갈등을 빚는 것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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