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며
2. 조식의 사상
3. 북인의 정치적 배경과 정책
4. 북인의 몰락과 조식학맥의 단절
5. 나가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조선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동안 권력을 잡았다 몰락한 붕당(朋黨)은 북인(北人)이었다. 북인은 광해군(光海君)의 신임을 바탕으로 한 정권을 잡았으며, 이에 광해군에 대한 충성 또한 강력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광해군에 대한 충성은 도를 넘어서게 되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는 이른바 폐모살제(廢母殺弟)의 과오를 저지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북인은 민생을 구하기 위해 은광(銀鑛)을 개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상업을 진흥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후금(後金)의 부상(浮上) 속에서 화기도감을 세워 화포를 개발하는 등의 국방 면에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러한 업적이 있었음에도 북인의 과오가 부각되면서, 몰락한 이유는 북인들이 지나치게 배타적이었고, 학문적 측면에서는 정통 성리학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중 략>
(2) 문묘종사(文廟從祀) 사건
그러면서 북인들이 스스로 정치적 고립을 더욱 심화시키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바로 문묘종사 문제였다. 1610년 4월에 성균관 유생 이지굉(李志宏)이 주도하여 5현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대대적으로 추진하였는데, 여기 5현에 선정된 인물이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정인홍이 불만을 품고 항의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스승인 조식이 5현에 선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인홍은 조식이 이황에 비해 꾸밈이 없으며, 의리가 분명하고, 명분을 철저히 지킨 유학자의 표본이라고 인식하였는데, 그러한 조식이 이황에 비해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조식 대신에 이황이 5현에 선정되어, 그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그는 1611년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을 냉혹하게 비판하였다. 게다가 정인홍은 조식이 이황을 싫어하던 것 보다 이황을 더 싫어하였다. 따라서 정인홍의 행적으로 대북은 이황의 제자들로 구성된 남인들로부터도 고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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