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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3.09.09
- 최종 저작일
- 20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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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제3공화국(박정희정부, 박정희정권)의 출범
Ⅲ. 제3공화국(박정희정부, 박정희정권)의 특징
Ⅳ. 제3공화국(박정희정부, 박정희정권)의 국가주의적 발전교육
Ⅴ. 제3공화국(박정희정부, 박정희정권)의 군사문화
Ⅵ. 제3공화국(박정희정부, 박정희정권)의 핵개발
Ⅶ. 제3공화국(박정희정부, 박정희정권)의 새마을운동
Ⅷ. 제3공화국(박정희정부, 박정희정권)의 노동정책
Ⅸ. 결론
본문내용
1940년 7월 여름 박정희를 비롯한 만주군관 2기생도들은 대련으로 해양훈련을 받으러 갔다. 2주간 수영과 조정훈련을 했다. 만주군관학교를 이끌고 있던 일본인 장교들의 안전의식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들은 총검술 훈련을 할 때도 반드시 5m 간격을 유지하도록 하더니 여기서는 모든 생도들의 수영실력을 측정한 다음 이마에다가 등급표시를 했다. 그리고는 바다에 줄을 쳐서 실력대로 수영을 하도록 했다. 무등급 자는 허리 이하의 수심에서만 수영을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3주간의 여름방학. 박정희는 구미에 들렀어도 아내와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에는 잘 가지 않고 무서운 형 상희의 눈을 피해서 친구들 하고만 어울려 다녔다. 박정희의 첫 결혼이 단란하였더라면 그가 아내와 헤어져 만주로 가는 결단을 내릴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박정희는 신경으로 돌아갈 때는 문경에 들렀다. 옛 하숙집에 머물면서제자들과 재회하여 놀다가 떠났다. 1940년 여름 민족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시킨 일제는 창씨개명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만주군관학교에서도 이해 가을에 조선인 학생들 24명(1기생 13명, 2기생 11명)을 호출하더니 1주일간의 휴가를 주었다. 고향에 가서 창씨개명을 해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구미에 내려와 상희형과 의논했다. 조선일보 선산지국을 경영하던 박상희는 이 신문이 폐간된 이후에는 조선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문'으로 옮겨 기자 겸 지국장 일을 보고 있을 때였다. 이 항일활동가도 시류를 정면으로 거스를 수는 없게 되었다. 그는 고령박씨에서 '고목'이란 성을 취한 뒤 작명을 해주었다. 박상희는 '다카키 소기(고목상희)',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고목정웅)', 박정희의 조카 박재석은 '다카키 이사무(고목용)'가 되었다. 박정희의 선배인 1기생 방원철은 가타야마 유이치(방산웅일)로, 박임항은 츠루야마 링고(학산임항)로 개명 했다. 방원철은 누군가가 자신을 "어이! 가타야마"라고 부를 때마다 챙피한 생각이 들었다. 오기가 강한 박정희는 더 했겠지만 그는 일단 순응하는 모범생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던 사람은 박정희의 동기생 강창선이었다. 러시아 원동지역에 살다가온 그는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청년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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