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의열투쟁, 이념,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연통제, 대한민국임시정부 교육기관,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인물,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사료편찬회, 대한민국임시정부 공군창설계획
- 최초 등록일
- 2013.09.02
- 최종 저작일
- 20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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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의열투쟁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념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연통제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육기관
1. 공립 3․1중학
2. 박달학원과 남화학원
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파인물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사료편찬회
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군창설계획
Ⅸ. 결론
본문내용
임시정부는 독립의 준비정부로 탄생하였는데 국토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에 있었고 실제에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국민적 기반을 유지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국민적 기반을 유지한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임시정부의 과제였고 존립의 생명이기도 했다. 국민적 기반을 상실하면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1919년의 임시정부 수립 이후 1945년 임시정부의 환국까지의 업적에서 1932년 윤봉길 의거를 특별히 손꼽는 이유도 그때 국민적 기반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의 업적은 광복군을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고, 외교활동을 강화하여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 받고, 통일전선을 형성했던 중경시기의 활동이 가장 괄목된 것이다. 그것을 백범 김구가 주도하여 이룬 업적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김구를 임시정부의 대표자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업적이 있었으므로 광복후 임시정부는 국민의 환영을 받으며 환국할 수 있었다. 미군정에서는 개인 자격으로 환국했다고 공표했지만 한국 국민에게는 임시정부였다. 1945년 12월 19일 서울 운동장에서 국민적으로 임시정부 환영대회를 개최했던 것이 그것을 말한다.
해방 조국에서 임시정부가 할 일은 1945년 9월 3일 발표한 ‘임시정부 당면정책’에서 밝힌대로 과도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소가 그것을 가로막았고 12월 28일에는 신탁통치를 한다고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임시정부는 전후 패권주의와 맞서 새롭게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새롭게 변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글은 여기까지의 문제를 진단하며 평가해 보았다. 필자는 1972년에 ꡔ독립운동사 제4권-임시정부사ꡕ를 집필하면서 임시정부 연구에 관심을 가졌던 이래 임시정부에 관한 몇 가지 글을 발표한 바가 있었지만 평가를 묶어 생각해 본적은 이 글이 처음인 것 같다. 정상적 정부도 평가의 도마에 올려놓으면 한계와 오류가 보이기 마련인데 하물며 임시정부의 경우에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한편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었던 인사들의 인간적 측면을 추적해 보려고 했다가 단념하고 말았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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