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 일제시기) 조선시가지계획령, 도시발달, 일제시대(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 일제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민족주의사관, 친일파, 재일한국인,대중희극
- 최초 등록일
- 2013.08.06
- 최종 저작일
- 2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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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일제시대(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 일제시기)의 조선시가지계획령
Ⅱ. 일제시대(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 일제시기)의 도시발달
Ⅲ. 일제시대(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 일제시기)의 대한민국임시정부
Ⅳ. 일제시대(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 일제시기)의 민족주의사관
1. 백암 박은식(백암 박은식)
2. 위당 정인보(위당 정인보)
3. 단재 신채호(단재 신채호)
4. 육당 최남선(육당 최남선)
5. 소결론
Ⅴ. 일제시대(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 일제시기)의 친일파
Ⅵ. 일제시대(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 일제시기)의 재일한국인(재일한인)
Ⅶ. 일제시대(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 일제시기)의 대중희극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일제시대(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 일제시기)의 조선시가지계획령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하여 총독부의 지세수입을 급증시켰다. 1911년에 624만원의 지세수입을 거두어들였는데, 사업이 끝난 후인 1920년에는 1,100만원으로 약 2배 정도의 지세를 조선인에게 징수하였다.
이 사업은 단순한 토지조사가 아니라 일제가 조선을 식량공급지로 만듦으로써 저급한 단계의 일본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인 농업문제의 곤경을 타개하려는 것이었으며, 나아가 농민을 토지에서 쫓아냄으로써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여 식민지적 초과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기반구축작업이었다.
이러한 많은 국유지 창출은 농민들에 대한 토지 수탈이었으며, 이들 약탈토지는 이후 동양척식회사나 일본인 회사, 지주 등에게 불하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인 토지 소유가 증가하였다. 사업이 실시된 7년 동안 일본인의 토지 경영은 경영인수는 10배, 투자액은 5배 이상, 면적은 4배 정도 증가하였다. 예를 들면, 1911년에 일본인으로서 백 정보 이상의 농업경영자수는 74명이었고, 그들이 농업에 887만 여 원의 자본금을 투자하면서 52,400정보의 경작지를 경작하였다. 이것은 일본인 농업경영자 전체의 2할, 경영면적은 4할, 투자액은 7할에 해당하였다. 그러한 현상이 토지조사사업이 끝난 1918년에는 800정보 이상을 소유한 일본인 지주는 47명, 1921년 현재 100정보 이상 소유자는 490명에 달할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에 대해 식민지 지배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토지소유권의 확인과 지세 부과의 정리를 폭력적으로 행했던 것이고, 그 결과 방대한 토지 약탈과 지세 수탈이 강행되었던 것이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경역시구 개정에 따라 간선도로를 개수하고 `시가지 건축 취체규칙을 정하여 도시계획적 입장보다는 건물의 구조제한에 중점을 두고 서울의 모습을 정비해 나갔다. 시가지건축취체규칙에는 악취나 매연․분진을 발생시키는 유해한 공장은 특별히 지당된 지역에만 입지하도록 하여 구미 초기단계의 공해방지적(nuisance)인 용도지역제와 유사한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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