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신간회]1920년대의 신간회, 1920년대의 임시정부, 1920년대의 청년운동, 1920년대의 한인노동자, 1920년대의 노동공제회, 1920년대의 농민운동 분석
- 최초 등록일
- 2013.07.23
- 최종 저작일
- 2013.07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5,000원
목차
Ⅰ. 1920년대의 신간회
Ⅱ. 1920년대의 임시정부
Ⅲ. 1920년대의 청년운동
Ⅳ. 1920년대의 한인노동자
Ⅴ. 1920년대의 노동공제회
Ⅵ. 1920년대의 농민운동
본문내용
Ⅰ. 1920년대의 신간회
신간회가 창립될 무렵인 1927년 수원지역에는 사회단체로 水原靑年會, 懿法靑年會, 水原救濟會, 사-ㄹ靑年同盟, 印刷職工親睦會, 革成團, 水原衡平社 등이 있었다. 이들 사회단체는 天道敎, 聖公會, 基督敎 등 청년단체들과 상호 협력하면서 신간회 수원지회 설립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들 단체 중 혁성단과 孔錫政이 주도하는 사-ㄹ靑年同盟이 사상단체로 활동하였으며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하였다. 수원지회는 洪鍾珏의 天道敎靑年會(天道敎), 金露積의 進明俱樂部(聖公會), 金炳浩의 懿法靑年會(監理敎) 등 민족주의 세력과 孔錫政의 사-ㄹ청년회, 水原靑年會의 崔信福禹聖奎 등 사회주의 계열의 협동전선으로 설립되었다.
천도교청년수원동맹은 天道敎靑年同盟 本部가 신간회 창립과 京城支會 조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자 수원에서도 지회결성에 적극 참여하였다. 천도교청년수원동맹의 수원지회 설립의 참여는 李炳憲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李炳憲은 평택군 현덕면에서 출생하였지만 교회활동은 수원교구에서 주로 하였다. 그는 수원교구장을 역임한 李敏道의 독자로 일찍부터 천도교의 종교적 수양을 쌓았다. 1911년 수원군교구에서 운영하는 제544강습소를 수료하였으며, 3.1운동 직전까지 수원교구에서 傳敎師, 共宣員, 典制員으로 활동하였다. 3.1운동 때에는 보성전문학교 학생으로 탑골공원과 태화관의 상황을 연락하였으며, 수원과 남양 제암리에서 3.1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에는 天道敎靑年會 水原支會를 창립하고 초대 支會長으로, 천도교중앙총부에서는 經理課 課員經理課 宗理師布德課 宗理師로 활동하였다. 교단이 신파와 구파로 분규를 겪게 되자 구파측 중앙총부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또한 이병헌은 天道敎靑年同盟 本部에서 新幹會 결성에 참여하게 되자 京城北部支會 設立準備委員, 京城支會 幹事, 京城支會 庶務部 常務幹事로 京城支會의 핵심인물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그의 신간회 활동은 敎會的 인간적 교류를 맺고 있던 天道敎靑年水原同盟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洪鍾珏과 긴밀한 연락을 하면서 水原支會 설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참고 자료
강대훈(2000), 1920년대 진주지방 농민운동에 관한 연구 : 진주노동공제회를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김영근(1987), 1920년대의 민족해방운동 신간회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김희곤(1982), 1920년대의 임시정부 외곽단체, 경북대학교
정혜경(1991), 식민지시대 在大阪 韓人노동자의 생활상 : 1920년대를 중심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영건(1972), 1920년대의 한국농민운동, 건국대학교사학회
최용석(2010), 1920년대 경상북도 영일군지역의 청년운동, 계명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