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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3.07.20
- 최종 저작일
- 20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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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성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배경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정승인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인사회
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남화한인청년연맹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남북연석회의
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애국부인회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1942년 내외정세의 변화와 주체적인 인식에 근거하여 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의 3단체가 임정에 참여하였다. 민혁당은 내외의 조건 변화를 계기로 임정을 개조하여 민족해방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으로 만들겠다는 임정 개조의 논리하에 임정에 참여하였다. 민혁당은 임시약헌 수개, 건국강령 수개, 국무위원 선임 문제 등 주로 임정의 헌정체제를 수정함으로써 한독당 일당 위주의 임정체제를 확대·개편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민혁당의 노력은 1944년의 제5차 개헌과 연립내각의 구성을 통하여 한독당 일당 위주의 임정의 틀을 바꾸는 데 일정 정도 성공하였다. 그러나 건국강령 문제는 합의를 보지 못하였고, 임시약헌 수개 문제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현 거주지별 선거제를 관철시키지 못하였다.
신한민주당은 임박한 해방을 준비할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더욱 치열해진 임정내부의 대립과 갈등에 대한 비판을 계기로 결성되었다. 신한민주당 결성을 계기로 임정 내 반한독당세력은 민혁당과 신한민주당으로 이원화되었다. 이들 양세력은 임정 개조에는 이해관계를 같이하였으나 그 구체적인 실천방안에 있어서는 합일점을 찾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통일된 대오를 형성하여 한독당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중 략>
일본에 대한 항전을 회피하던 소극적 국면이 적극적 단계로 전환된 것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였다. 이후 국민당 정부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한인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촉구하였고, 상당한 한계가 있었지만 한중연합을 매개로 한 적극 항전노선을 취하였다.
한국이 일제에 병탄된 뒤 중국인들은 대체로 세 가지 동기에서 한국독립과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인식하고 지원했다.
첫째는 한국이 전통적으로 중국의 속방이었으며 한국인들이 중국인들과 유사한 민족이고 동일한 문화를 가졌다고 보는 그릇된 인식에서였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한국 인식은 독립운동 지원을 이끌어 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요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반대로 이후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독립운동 및 관련 조직의 독자성을 부인할 수 있는 장애요인이 되기도 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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