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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3.07.20
- 최종 저작일
- 20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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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학생독립운동
Ⅱ.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노동운동
Ⅲ.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5 18광주민주화운동(5 18광주민중항쟁, 5 18광주민주항쟁)
Ⅳ.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항일광주학생운동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학생독립운동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한 · 일 학생간의 충돌로 발단된 광주학생운동은 11월 3일의 광주지역 시위를 통해 본격화되었다. 광주고보를 비롯한 광주의 각 학교 한국인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벌어진 이 날의 시위는 성진회 출신의 청년운동세력과 독서회중앙부 같은 학생 비밀결사들의 지도력에 의해 조직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당시 광주지역에는 독서회중앙부 아래 광주고보 · 광주농업학교 · 광주사범학교 · 광주여고보 등에 독서회가 조직되어 있었으며, 이들 조직은 독서회중앙부를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었다.
1차 시위 후 독서회중앙부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 지도부는 두 갈래의 투쟁 방침을 정해 놓고 있었다. 하나는 1차 시위에 이어 2차 시위를 전개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광주의 시위를 전국으로 확산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1월 4, 5일경 독서회중앙부는 신간회 광주지회와 광주청년동맹 등 광주지역의 사회 · 청년단체와 결합하여 투쟁을 효과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학생투쟁 지도본부를 결성하였다.
<중 략>
당시 학생운동은 대개 동맹휴학의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1920년대 전반기에는 대체로 ‘시설개선’이나 ‘교원배척’ 등의 요구가 많았다. 학생들은 자신들을 짓누르고 있는 침략자 일제당국자들을 미워하고 타도하기 위한 애국투쟁으로 동맹휴학을 자주 이용하였는데, 일제의 고등경찰은 맹휴의 기본성격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조선에 있어서의 학생사건은 많은 경우 일반적 사회현상의 반영이라 말할 수 있다. 즉, 학생운동의 추이도 항상 일반사상에 수반하고 있다고 말해도 별로 틀린 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 이것을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던 간에 민족적 감정이 원동력이 되고 따라서 단순한 학생맹휴사건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하나의 국부적 문제로 보지 않고 전체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다분히 있다. (중략) 일반의 뇌리에 식민지 교육 즉, 노예교육이라는 관념이 상당히 뿌리 깊게 인상되어 있었으니, 때로는 제국주의 교육이라는 대명사까지 붙여 반항기분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현 교육제도에 반대하는 것이 있으나, 이것을 반대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취득하기 위해 이용해야 함으로 할 수 없이 현재의 교육기관에서 배울 수밖에 없다는 태도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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