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 무관학교 - 교내, 교외 활동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13.06.04
- 최종 저작일
- 20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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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신흥무관학교의 교내활동
1)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
2) 백서농장(白西農莊)
Ⅲ. 신흥무관학교의 교외활동
1) 서로군정서
Ⅳ.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1909년 신민회(新民會)는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이동녕 · 이회영 · 장유순 등을 만주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1910년 7월 남만주 삼원보에 우선 정착하였고, 1911년 봄 한인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한 바 있다. 그리고 청년들을 조국광복의 중견 간부로 양성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 이후 통화현, 합니하로 옮겨 1913년 5월 신흥중학교로 개칭하였다. 이후 신흥중학교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한 적도 있었지만 1919년 유하현 고산자가로 이전하여 신흥무관학교로 통폐합되었다. 설립 당시의 교직원은 양규열 · 윤기섭 · 이장녕 등이었으며, 통화현 · 임강현 · 해룡현 등지에 분교를 두었다.
<중 략>
서로군정서 특파원에 의한 국내 군자금 모금 활동은 1919년에서 1922년 사이에 밝혀진 것만 총 14번이 시도되어 모두 4,515원의 모금이 이루어졌으며, 주요 모금 대상 지 역은 평안도와 경상도였다. 평안도는 서간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역이었고, 경상도는 서로군정서에 참여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이 이 지역 출신이었다는 점이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서로군정서 특파원에 의한 국내 군자금 모금 또한 1920년 말부터 시작된 일제의 간도 출병으로 서로군정서군이 밀산을 거쳐 러시아의 자유시로 동하고 서로군정서 본부 역시 일제의 침략을 피해 액목현으로 이동한 후, 그 세력 또한 약화되었기 때문에 1921년 이후에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서로군정서는 한족회 등을 통해 모금한 군자금과 신흥무관학교 등에서 양성된 독립군을 바탕으로 서간도 지역과 국내에서 친일 세력을 제거하고, 국내로 진입해 일제의 주재소와 관공서를 습격파괴하는 등의 무장투쟁에 나서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김병기 ,「서간도 광복군사령부의 성립과 활동」,『한국근현대사연구 제 9집』, 한울, 1998.
김준엽 외 4명,「서로군정서과 대한독립단」,『한국 獨立運動社 제 1권』, 한국일보사, 1987.
양춘식,「서간도 독립운동과 신흥무관학교」,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학위논문, 2006.
참고영상
KBS 역사스페셜 - ‘신흥무관학교’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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