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문화사 리포트
- 최초 등록일
- 2013.05.19
- 최종 저작일
- 2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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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양사의 이해 리포트로 동양문화사에 대한 리포트를 작성하였습니다.
춘추전국시대부터 등장 하였던 사상들과 이를 주장한 선인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서술 하였습니다.
목차
①춘추·전국시대의 사회변혁과 사상
②진·한 통일제국에 관하여
본문내용
전국 국가의 형성과 경쟁
전국시대의 개막과 함께 나타난 국가형태상의 변화는 읍제국가의 붕괴와 영토국가의 출현이다. 즉 종래 분권적 봉건질서하에서 읍을 단위로 유지되던 지배가 군현제하의 영역에 의한 직접지배로 변화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군현제적 지배의 관철이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전국시대에 들어오면서 대다수의 약소국은 이미 겸병을 통해 정리되고 소수의 강대국만 남게 되었다. 이들을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 하는데, 진, 초, 제, 한, 위, 조, 연(燕)아 그들이다. 그러나 제후국 간의 전쟁은 오히려 더욱 격화되었다. 춘추시대에 비해 전쟁의 발발 건수는 반 정도로 줄었지만 전쟁의 규모는 오히려 확대되었고, 전쟁 기간도 더 길어졌다. 이는 춘추시대까지 미약하나마 유지되던 종법적인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고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고 이끌어 가는, 국가에 의한 통합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시대부터는 전쟁에서의 전수르이 중심이 수레전에서 보병전으로 전환되었다. B.C.540년 최초로 보병이 사용된 이래 꾸준이 그 중요성이 확대된 결과였다. 수레전은 지배층인 사 계층 이상으로 구성되는 국인층 이상만이 전쟁이 동원되었다. 일단 교전에 들어가 한 편의 수레진용이 무너지면 전쟁의 성패는 그것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에 고작 하루나 이틀이면 끝났다. 또한 오새화된 성곽을 공격하는 데 수레전은 효과적이지 못해 공성전(攻城戰)은 아주 드문 경우 였으며 지역적으로 화북일대의 국가에서 성행했다.
반면 보병부대는 원래 강과 호수가 많았던 오·월에서 비롯되어 중원의 제국으로 전파되었는데 전국시대에는 대규모의 보병이 주력이 되었다. 전쟁의 조건이 변화하면서 전차의 중요성이 감소된 데 그 이유가 있었다. 즉 전쟁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늪지나 산지 같은 지형에서도 전투가 벌어졌고, 악천후의 상황 속에서도 전투가 지속되는 등 장기화되었다. 이런 조건에서는 기동성을 갖춘 보병이 효율적이었다. 보병보다 기동성이 뛰어난 기병은 기습공격이나 측면공격에 동원되었지만, 전면공격이나 포위공격망 돌파, 성의 함락 등은 역시 보병이 담당했다. 이로써 전국 중기 이후에는 수십만의 병력이 수년간 전쟁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런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려면 자연히 기존에는 병역의 없었던 농민들이 징병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전쟁에 동원되는 병력의 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춘추 전기 강대국의 병력은 대략 3만 정도로 추산된다. 그러나 춘추 말에는 10만 정도의 병력으로 증대되었고, 전국시대 7웅의 군사력은 약소국이었던 한과 위의 병력이 30만, 진과 초는 약 100만에 달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