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사-해방 이후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 최초 등록일
- 2013.04.23
- 최종 저작일
- 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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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2. 공산주의 운동
1) 해방이전의 움직임
2) 조선공산당의 결성
3) 인공과 미군정
4) 민전결성
5) 공산당과 미소공위
6) 6) 신전술-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
7) 3당합당과 남로당 탄생
8) 공산당의 투쟁노선과 미군정
9) 미소공위 결렬과 남로당의 쇠퇴
3. 마치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해방 직후는 한반도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대중들의 변혁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일제 식민지하에서부터 누적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노력들이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고, 그것은 새로운 자주독립국가의 수립으로 모아졌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는 소위 ‘좌익세력’들이 있었고, 이들은 다양한 조직을 통해 변혁운동을 이끌었다. 그중에서도 조선공산당(이하 조공), 남조선로동당(이하 남로당)은 변혁운동의 중심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해방직후의 사회변혁운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중운동을 분석하는 한편 대중운동을 지도하였던 위와 같은 조직들의 활동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우익세력과 마찬가지로 해방이후 민족을 위한 움직임이었다는 것은 이미 많은 연구를 통하여 밝혀졌으며 최근의 연구들은 이들 공산주의 운동의 오류와 한계를 인정하고 있다. 이에 해방 직후 공산주의 운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중 략>
46년 8월과 11월에 남북노동당으로 개편할 때부터는 남로당은 북로당의 영향을 크게 받기 시작했다. `인공`수립을 앞두고 평양에 남북노동당 연합중앙위원회를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상 북로당의 영향권에 남로당이 들어간 셈이 된다. 46년 3월에 이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라는 공산정권을 만들었었다. 박헌영일파는 이 노선에 대해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미소공위가 결렬하기 전까지는 북한지역을 완전 무시하고 남로당이 주가 되는 정권을 잡으려고 공작했다. 그러다가 이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북로당 주도의 인민공화국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부터 `남한에서의 투쟁`은 북로당의 지원 없이 남로당 단독으로는 할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남로당공작은 북로당의 전체적인 적화전략의 한 부분으로써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전락됐다. 따라서 `남한에서의 투쟁`은 인공의 이른바 `미해방 지구에서의 해방투쟁`이라는 성격으로 바뀌어 진 것이다.
참고 자료
김남식, 『남로당연구(1)』, 돌베개, 1984
한국역사연구회, 『한국현대사1』,「조선공산당·남로당의 변혁노선과 활동」, 풀빛, 1991
박일원, 『남로당의 조직과 전술』, 「남로당 정치노선에 대한 비판」, 세계, 1984
김남식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5, (서울: 한길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