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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3.04.16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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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연혁
Ⅲ.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의의
Ⅳ.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출범
Ⅴ.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자유당
Ⅵ.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대북정책
Ⅶ.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보훈정책
Ⅷ.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대군부정책
Ⅸ.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19세기말 20세기초는 세계뿐만 아닌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격렬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기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독립정신>>에서 외국인이 오는 것이 본래 나를 해하려는 주의가 없고 피차에 다 이롭기를 경영함인즉 외국인이 오는 것을 막을 까닭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배재학당 등에서 선교사들로부터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논리에 철저히 감염되어 그에 대한 무저항적 수용자세를 보이면서 외교를 친밀히 하는 것이 나라를 부지하는 법으로 생각하였다. 위임통치론은 이승만 외교론의 핵심으로, 구한말과 1차 세계대전 직후, 1945년 이후에 각각 형태만 달리하고 있을 뿐 이승만의 정치적 입장-이승만 노선을 일관한 주제였다. 그것은 여태까지의 모든 독립운동을 부인하고 을사조약과 비슷한 내용이며 오히려 1919년 2월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위임통치청원서는 내정까지 위임시킨다 하였으므로 그 대상국만 달랐지 을사조약에 정미 7조약 등을 포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서의 여파는 일파만파로 퍼져 1921년 4월 19일의 그의 위임통치안에 대한 성토문을 인용하자면 “한국은 예로부터 독립국이었으며 독립을 위해선 혈전함이 민족정신이며 동포의 총력을 모아야 할 때에 민족의 진의를 회의하게 되니, 이승만 등을 성토매장 아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승만의 외교론은 민중과는 전혀 관계없이 오직, 외국, 주로 미국의 요로에 독립을 호소하는 일에만 전념했으며, 박용만의 무력항쟁 노선을 비웃고 억압하였으며, 독립운동자들의 폭력과 테러활동을 반대하는 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승만의 외교론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은 신채호에 의하는데, 그의 요지는 설사 외국의 힘으로 독립을 얻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그 나라의 노예 되는 것을 면할 수 없는 것이므로 외교론에 의한 독립이란 결국 지배국가를 갑에서 을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해방되기까지 20여 년 간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대한 외교적 지지를 얻는 일과, 미국 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일반대중의 이해와 동정을 사는 두 가지 목표를 추구하여 몇 차례에 걸쳐 미국과 유럽 등에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어떤 목표도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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