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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3.04.15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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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도마 안중근의사의 연혁
Ⅲ. 도마 안중근의사의 이토히로부미 살해이유
Ⅳ. 도마 안중근의사의 의거활동
Ⅴ. 도마 안중근의사의 유해발굴사업
1. 그 간 추진실적
2. 문제점
3. 향후 추진계획
4. 안의사 유해조사 및 발굴관련 주요기관 활동
Ⅵ.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일제시대의 계몽운동은 1904년~1910년간 일제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고자 개화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실력 양성 운동을 말한다. 이 운동은 한국민족의 국권 박탈을 우리의 실력과 힘이 일본 제국주의의 그것보다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인식한 사람들이 한국민족의 실력과 힘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 했던 민족 양성운동으로, 이 운동을 이끌어 간 사상은 개화자강 사상을 계승한 애국 계몽사상이었다. 이 운동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일어난 것이었고, 총괄적으로 짧은 시간에 대단한 성과를 내어 민족 역량을 크게 증강 시켰다. 이때 양성한 실력이 독립운동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정치단체 운동은 1904년 7월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반대하여 설립된 보안회의 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보안회의 뒤를 이어 헌정연구회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 반일적인 활동을 펼쳤으며 이후 1906년 4월 대한 자강회가 설립되었고, 1907년 11월 대한 협회로 재조직 되었다. 그러나 신문지법과 보안법으로 인해 일제의 한국에 대한 재배권이 강화 되었으며 지도부가 일진회와의 연합을 기도하는 등 그 성격이 모호해졌다. 그 다음으로 학회의 활동을 보면 지방 출신으로 사울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각 지방별로 학회를 설립 하였다. 1906년 평안도와 황해도 인사들이 서우학회를, 함경도 인사들이 한북흥학회를 설립하였다가 이 두 학회가 1908년 서북 학회로 통합되어 활발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중 략>
전 민족적 항일투쟁운동이었던 3?1운동을 기반으로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으로 약칭)는 상해에 근거지를 두고 국권회복을 위한 한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던 세계정세 하에서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많은 어려움에 부딪쳤다. 그것은 일본이 승전국 중 한 나라였고, 서구열강은 중국을 대신하여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대국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던 일본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민족의 문화적 전통과 정치적 자립의 당연성을 세계열강에 호소하고, 더불어 일본제국주의의 불합리한 침략이 세계평화의 파괴범임을 세계 여러 나라에 여론화시켜서 국제적 후원과 지지 아래 한민족의 독립을 이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임정은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외교방략을 채택하였고, 외교활동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제국주의 열강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던 당시 국제사회의 분위기는 임정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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