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의 사회진화론에 관하여
- 최초 등록일
- 2013.04.09
- 최종 저작일
- 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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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윤치호의 사회진화론 수용과정
3. 윤치호의 사회진화론 특징
4. 사회진화론의 적용
본문내용
1. 서론
(1)들어가며
사회진화론은 1870년대부터 대두되어 1910년까지 크게 유행한 사상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과 미국, 두 나라를 통해 최초로 접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행하게 된 것은 양개초의 저작을 통해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사회진화론이 유행하기 전 먼저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자기 나름대로 적용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유길준과 윤치호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생각해보아서 윤치호는 한국 근대사에 족적을 남긴 거두였다. 말년에 친일적인 사상을 받아들여 윤치호 평전의 이름도 『윤치호의 협력일기』일 정도로 평가가 절하되고 있지만, 근대사의 거두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1880년대와 1890년대 초반에 일본, 중국, 미국에서 유학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이었다. 두 번째로는 한말 개화ㆍ자강운동의 핵심인물이었으며, 세 번째로는 일제시기 조선 감리교의 대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일제말기 친일파의 대부로 활동하였다.
<중 략>
계속 언급했듯 윤치호는 조선인 최초의 미남감리교 세례교인이었고, 사회진화론에 밀리긴 했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이는 사회진화론을 적용하는 과정에서도 기독교운동이 빠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치호는 사회참여적인 기독교 운동을 진행하였는데, 이것은 윤치호가 ‘현재의 구원 없이는 천국의 구원도 없다’, ‘일을 못해내는 종교는 무종교보다 더 나쁘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기독교를 현실주의적이고 현세지향적인 종교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사회를 변혁시킬 힘으로써 기독교를 주목하여 선교활동에 적극적이었고 선교활동이 곧 개화활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중에서도 한국의 선교사업 중에 조선인에게 가장 유익한 사업은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이라고 보고, 기독교 선교를 통해 교육사업을 장려하고 조선 민중을 개화하여 자급자족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으로 윤치호의 기독교활동은 사회참여적인 성격을 띄었으며, 총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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