흄의 인과관계의 필연성 비판에서 시작된 ‘지식의 근원’에 대한 질문은 칸트에 의해 철학적 사고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촉발한다. 즉 지식의 근원은 경험이지만 경험 자체가 지식은 아니며, 경험이라는 재료가 인간의 선험적 개념들(a priori concepts)에 의해 조직된 것이 지식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칸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즉 우리 인간이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객관적 대상이라고 보는 것은, 칸트의 인식론에 의하면, 단지 사물의 외양인 현상(phenomenon)에 지나지 않으며, 이른바 ‘물자체(Ding an sich)’는 결코 인간의 인식영역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 접근할 수 없는 물자체가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되는 현상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쓸 때 보이는 방안의 시계와 같은 사물은 물론 매일 같이 지내는 가족조차도 우리는 그 실체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현상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일단 상식적으로는 부자연스러운 주장이다. 우리에게 염세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그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에서 칸트의 이 부자연스러운 인식론을 뒤집으려고 시도했다.
<중 략>
모든 욕구는 필요로부터 즉 결핍으로부터 생긴다. 그것이 충족되면 욕구는 사라진다. 그러나 충족된 욕구가 한가지라면 적어도 열 가지는 거부된 채로 남아 있다. 더구나 욕망은 오래 계속되고 욕구는 한이 없으며 충족은 잠깐이고 그나마도 부족하게 채워지기가 일쑤이다. (…) 그것은 마치 오늘을 연명시켜 삶의 고통을 내일까지 연장시키는 거지에게 베푼 자선과 같은 것일 뿐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4장
따라서 의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삶의 고통을 덜어내는 길이다. 쇼펜하우어가 인도나 초기기독교의 금욕주의에 경도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 자신도 인정하듯이 그의 사상과 불교와의 유사성이 드러난다. 즉 불교의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사성제(四聖諦)를 따르자면, 인생은 고통이며, 고통은 집착에서 생기고, 고통의 원인은 소멸될 수 있으며, 고통을 소멸하는 길이 있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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