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상인의 자본축적 과정과 쇠퇴요인은
- 최초 등록일
- 2013.03.17
- 최종 저작일
- 20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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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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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 리 말
2. 조선초기 개성상인의 성장
3. 개성상인의 자본축적 활성화
4. 조선후기 개성상인의 쇠퇴요인
5. 식민지시대와 그 이후의 개성상인
6. 맺 음 말
본문내용
1. 머 리 말
개성상인은 양 시대인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활발히 활동한 商人集團이다. 그들은 양 시대에 각기 두르러지게 번성하고 발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개성 상업과 개성상인의 활동상을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까지 알아보고, 개성 상업의 萎縮과 復舊의 사정, 개성상인의 발전 기반을 생각해보고 알아보자는 것이다.
개성상인은 고려시대 이후 줄곧 이 땅에서 상업 유통업계를 장악한 상단이다. 고려시대에는 개성이 정치˙경제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상권을 장악하는데 유리하였다. 개성상인들은 사신의 왕래에 의하여 발생하는 정부 무역(公貿易)과 외국상인들에 의한 민간 무역(私貿易)을 하였다. 개성 근처 예성강하구의 벽란도는 국제무역항으로 구실을 하였다. 그래서 고려의 수도인 개성은 商業都市로 발전하였다. 반면에, 조선시대에는 이씨 정권에 반대하는 개성상인은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오로지 상업에만 열중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개성상인은 전국 각지에 松房을 설치하여 주단과 포목 등을 판매하였는데 송방은 보부상의 據點이 되었다. 당시 약 1만명으로 추정되는 개성상인이 전국적으로 분산되어 行商을 하였으며, 송방은 정보교환과 상품공급 장소 및 보관소로 이용되었다.
< 중 략 >
개성상인은 외국무역을 주도하고 전국에 商業組織망을 형성하면서 상업자본을 축적하였다. 이를 기초로 인삼재배와 가공업에 進出하기도 했다. 개항 후 경강상인 등 포구 주인층은 外來資本에 점차 굴복된 반면 개성상인은 외래자본이 침투하기 어려운 내지유통망을 근거로 자본을 축적하였기 때문에 외래자본과 끝까지 투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양적증대에 불과했을 뿐 근본적으로 개성상인을 비롯한 조선의 상업자본이 조세의 金納化, 개항, 새로운 외국무역 등 여러 가지 변화를 극복하고 더욱더 성장할 수 있는 초석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개성상인의 경우 상단중심에서 초기의 부보상 중심의 형태로 회귀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하였지만 미약했던 자본력을 감당하기에 어려움이 많았고 결국 韓日合邦을 통해서 조선의 주권을 거머쥔 일본에 의한 商業資本, 그중에서도 개성상인에 대한 수탈정책을 통해 커다란 타격을 받았음이 사실이다. 회사령의 제정 人蔘販賣權의 강탈 등을 거치며 활동영역과 자본내지는 활동규모가 극도로 쇠약해졌음은 이를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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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城商人의 商業基盤 및 器質에 관한 硏究 한국 傳統商學연구.
한우근 韓國 開港期의 商業硏究.
姜萬吉 <開城商人硏究> <<韓國使硏究>> 1972.
김성수 開城商人發達使연구 -開城商人情神연구 2002.
양정필 19세기 開城商人의 資本전환과 蔘業자본의 성장 2002.
박경식, 日本帝國主義の朝鮮支配 (上), 靑木書店, 1973, pp. 108-109.
두산브리테니커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