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회 형성사 (서평)
- 최초 등록일
- 2013.03.14
- 최종 저작일
- 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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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감리교회형성사 서평
목차
없음
본문내용
웨슬리 형제는 지극히 종교적인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것은 그의 삶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모두 비국교도회의 목사였고, 부모는 자유 의사로 영국성공회로 돌아왔다.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는 토리당이자 고교회 사람이었고, 1697년-1735년까지 링컨셔주 엡웻교구 사제였다. 반면에 어머니 수산나는 추방된 제임스 왕에게 충성을 나타내 정치적으로 불일치하였다. 그들의 부모는 19명의 자녀를 낳아 10명을 성장시켰다. 그의 아버지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내적 증거’의 확신으로 기뻐했던 사람이었다. 어머니 수산나는 웨슬리 형제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의 의지를 꺾는” 훈련으로 날카로운 지성과 깊은 신앙에의 헌신을 결합하고 있었다.
<중 략>
1781-1791년까지의 10년동안은 감리교 운동이 독립된 교파를 형성할 만큼 빠르게 진전된 기간이었다.
웨슬리 형제는 설교가 휫필드와의 만남을 통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특히 야외설교는 휫필드의 영향이었다. 웨슬리는 일반적으로 원고없이 즉석에서 설교를 했는데 설교는 1시간 이상이나 계속된 경우도 자주 있었다. 많은 국교회 성직자, 특히 대주교는 감리교 설교가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다. 특히 야외 설교와 감리교 모임의 성장은 교회질서와 공인된 성직체계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또한 휫필드와 첨예한 신학적 대립이 있었다.
<중 략>
감리교도들은 세계도처에서 초교파적인 모험에 뛰어드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고 다른 기독교 종팓르과 연합하여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스리랑카, 가나 등에서 연합교회를 형성했다. 감리교회는 초교파적인 교회 연합을 위해 포용적 입장을 견지하며 노력해 왔다.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도 서로 함께 손잡고 나아가기를 지향한다.
단점에도 불구하고 감리교회는 살아 남았으며 쇠퇴와 성장, 분열과 화해의 시기를 거쳤으며 그것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21세기를 낙관한다. 영적 생동감을 가지고 미래의 세계 교회에 공헌을 할 것이라 믿는 것이다. 감리교도들은 웨슬리의 말대로 ‘모두의 친구이며 아무의 적도 아닌’ 존재로 남을 것이다.
참고 자료
「감리교회 형성사」 배리 테브러햄, 김희중 역, 감신,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