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정동극장][원각사]극장과 역사, 극장의 무대계획, 극장의 전문공연장화, 극장의 예술과 서비스, 극장의 성공 사례(정동극장), 극장의 성공 사례(원각사), 극장 관련 제언
- 최초 등록일
- 2013.02.22
- 최종 저작일
- 2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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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극장과 역사
Ⅲ. 극장의 무대계획
Ⅳ. 극장의 전문공연장화
1. 국립극장
2. 예술의 전당
3. 국립국악원
Ⅴ. 극장의 예술과 서비스
Ⅵ. 극장의 성공 사례(정동극장)
1. 운영체재의 변화
2. 전문공연장화 전략
3. 프로그램의 다양화
1) 관객 중심의 다양한 아이디어 공연 프로그램
2) 문화 시음회
4. 적극적인 서비스 마케팅 전략
5. 부대시설 변화
6.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서비스
7. 타 문화공간으로부터의 벤치마킹사례
Ⅶ. 극장의 성공 사례(원각사)
Ⅷ. 결론 및 제언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세계 연극사를 보면 극장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최초의 극장을 가진 나라는 그리스로서 서기전 5세기 무렵에 이미 반원형의 장소에 U자형으로 관중이 앉을 수 있도록 목조 무대를 세운 야외극장이 있었다. 1백년쯤 뒤에는 비교적 과학적 시설을 갖춘 아테네의 디오니소스극장을 비롯하여 그리스 전역에 40여개의 극장이 세워졌다. 그로부터 1세기 뒤에는 석조극장까지 세워질 정도로 서양에서는 매우 일찍부터 극장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개화기에 와서야 극장이 세워졌다. 고려시대에 산대라는 가설무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우리의 전통 극이 야외 놀이적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에 옥내 극장이 발전되지 못한 것이다. 개화기에는 우리나라 연극사에 있어 중요한 변화를 이루게 된 하나의 요인인 옥내 극장들이 설립되었다. 창고 같은 기존 건물을 연예공연을 위한 옥내 극장으로 개조하였는데, 광무대, 아현무동 연희장, 용산무동 연희장 등이 초기의 대표적인 임시극장들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옥내극장 형태를 갖춘 최초의 극장은 1902년에 설립된 협률사이다. 이 협률사는 연극 사상 최초의 국립극장이기도 한데 3년 반 만에 문을 닫기는 하였지만 개화기의 대표적인 극장이었다. 협률사는 5백석 규모의 중형극장이나 당시 극장 기술의 부족으로 인해 무대구조, 조명등에 있어서 원시성을 탈피하지 못하였다. 이 극장은 1908년 7월에 민간인들에 의해 원각사라는 명칭으로 재 개관되었지만 고전 예능과창극을 주로 공연하다가 국권 상실과 함께 2년여 만에 완전 폐쇄되었다.
개화기에는 이러한 관립극장과는 달리 광무대, 연흥사, 단성사 등의 사설극장 등이 세워져 무대예술 발전에 기여했다. 동대문 부근, 종오, 낙원동 등지에 위치하였던 이들 사설극장들도 시설은 형편없었고 중형 규모였다. 그러나 이들 사설 극장 뜰은 창극이나 민속 무용들의 전통 예술을 주로 공연한 광무대를 제외하고는 주로 영화를 많이 상영하였다. 1911년부터 신파극이 생기면서 연흥사는 그 본거지 구실을 하였다. 이들 극장들은 원각사가 그러했듯이 프로시니엄 아치 형태의 무대는 갖추었으나, 객석에는 의자도 배치되어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명도 전등을 사용하는 정도였다. 음향 시설도 되어 있지 않았고, 화장실 시설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여성들은 작은 요강을 갖고 극장에 갈 정도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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