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의 학우회, 1910년대의 희곡, 1910년대의 능금(사과), 1910년대의 계몽주의, 1910년대의 국제정세, 1910년대의 항일투쟁, 1910년대의 고금서화관 분석
- 최초 등록일
- 2013.02.22
- 최종 저작일
- 20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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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1910년대의 학우회
Ⅱ. 1910년대의 희곡
Ⅲ. 1910년대의 능금(사과)
Ⅳ. 1910년대의 계몽주의
Ⅴ. 1910년대의 국제정세
Ⅵ. 1910년대의 항일투쟁
Ⅶ. 1910년대의 고금서화관
본문내용
1881년 6월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이었던 유길준, 류정수, 윤치호 등 3명이 慶應義塾과 同人社에 입학하면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일본유학생사회는 1910년대에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 이하 학우회)’라는 단체를 중심으로 결속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초기에 정부주도의 유학생 파견정책에 의해 도일한 유학생들은 신분상 유력한 가문출신으로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 선발되었고, 개화정부에 의해 파견되어 학업보다는 官界에 진출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졌다는 등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와 일본학생의 차별적 인식과 대우에 굴하지 않고 동맹휴교사건(1905년 12월 발생)과 국화인형전시회사건(1906년), 와세다대학 모의국회사건(1907년), 박람회 한인裝置사건(1907년) 등을 통해 한국 유학생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나타냈다.
특히 1910년대의 유학생들은 1912년에 결성된 학우회라는 단일한 단체를 중심으로 결속력을 가졌다. 물론 이전 시기에도 유학생 단체는 존재했다. 그러나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1895년 4월 결성), 제국청년회(1895년 9월 결성)를 비롯한 각종 유학생 단체는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1910년대 이전 시기는 관비유학생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유학생간의 친목과 상호부조, 단결을 위해 유학생 단체를 결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적인 분파성이나 친목도모적인 성격이 강하여 외압에 견디기 어려웠으므로 부침이 심했다. 비록 이와 같은 한계는 있었으나 이 시기의 유학생단체는 유학생 상호간에 단결과 통합된 단체의 필요성을 제기하여 1910년대에 유학생이 학우회를 중심으로 결속하는데 토대를 제공했다.
일본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가운데 노동자는 오사카나 쿠슈 등지에 밀집한데 비해 유학생은 단연 도쿄에 몰려 있었다. 따라서 유학생 단체도 도쿄가 중심지였음은 당연하다.
학우회는 1909년 1월에 결성되어 도쿄 유학생의 구심체를 담당했던 대한흥학회를 모태로 한다. 대한흥학회가 강제병합으로 인해 조직이 강제로 해체된 이후 1911년 초 삼남친목회, 황평친목회, 청년구락부 등이 결성되었고, 이것이 통합되어 1911년 5월 조선유학생친목회가 창립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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