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클레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비교
- 최초 등록일
- 2012.12.23
- 최종 저작일
- 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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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테네의 집정관 페리클레스와 로마의 첫번째 황제인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를 여러 측면에서 비교서술하였습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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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그리스의 아테네는 민주정의 완성을 이룩하고 페르시아 전쟁에서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되면서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잡았었다. 이 후, 로마 공화정, 과두정이 무너지고 로마 제정이 시작되면서 로마는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이 두 시대의 중심에는 아테네 민주정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BC 461-429)와 로마 제정을 시작하고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가능케 했던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있었다. 각 시대의 번영을 주도했던 이 두 인물을 정치적인 측면에서 비교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그들이 정권을 잡게 된 배경을 비교 할 수 있다. 먼저, 페리클레스의 경우부터 살펴보자면, 페리클레스가 정치가로 등장하는 시기인 기원전 460년대에는 보수파와 개혁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원조를 요청하게 되었는데, 보수파의 지도자 키몬(Cimon)은 스파르타와는 평화를 유지해야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스파르타를 지원하자는 주장을 폈다. 이에 대해 개혁파의 중심인물 에피알테스(Ephialtes)는 스파르타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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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아우구스투스는 새로운 화폐 제도를 확립했고,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중앙 집권적 재판 제도를 창설했으며, 여러 도시 및 속주들에 대해 지방 자치를 상당히 폭넓게 허용하였다. 그는 관리의 임용 자격으로서 경험과 지성을 강조했다. 그는 속주 총독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행사했으며, 독직, 부정 등의 혐의가 드러난 총독들을 엄격하게 징계했다. 또한 고정된 봉급을 받는 징세관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파견했다. E.M.번즈, R.러너, S.미첨, 『서양 문명의 역사 1 : 역사의 여명에서 로마 제국까지』, 소나무, 박상익, 1994, pp.220~223
두 인물 다 도시의 조망을 개선하는 데 노력 하였고 공직 임명이나 역할에 대해서도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페리클레스는 공직 임용을 추첨제를 채택하여 시민 모두가 할 수 있도록 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경험과 지성을 잣대로 직접 관리를 임명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끔 하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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