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과 홍주9의사의 대마도 피수
- 최초 등록일
- 2012.11.09
- 최종 저작일
-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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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05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을사의병의 대표격인 홍주의 홍주의병, 그리고 최익현의 태인의병의 핵심참모들이, 일제의 이토 히로부미의 계획으로 인해 대마도로 피수(감금)된 상황과 과정, 그곳에서의 생활, 석방과정에 대한 리포트입니다.
이에 관한 연구가 최근에서야 진행되고 있어, 자료가 적기 때문에, 이 부분을 공부하려고 하시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목차
1. 머리말
2. 한말 의병의 대마도 피수 과정
3. 유폐의병의 대마도 유폐생활
4. 유폐의병의 석방과정
5.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한말 의병전쟁은 한민족의 구국성전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시작된 의병전쟁은 1905년 을사조약을 거치면서 한층 격화되었고, 1907년 광무황제 강제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을 계기로 대일 전면전의 단계로 발전되어갔다.1)이에 일제의 통감 이등박문은 증폭되어 가던 한민족의 항일기세를 꺾기 위해 영국이 이집트의 민족영웅이었던 아라비 파샤를 멀리 실론 섬에 유폐했던 사실에 착안하여 의병의 대마도 유폐계획을 수립하게 되었고, 이후 홍주의병의 홍주9의사와 태인 의병의 최익현과 임병찬을 대마도에 유폐시켜 철저히 감시하고 억압하였다.
<중 략>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제는 유폐의병에 대해 철저한 통제를 가하면서 다섯 차례에 걸쳐 적당한 시차를 두고 이들을 석방하는, 야비하고도 치밀한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일제가 이와 같이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의병들을 석방한 이유와 배경은 유폐의병들을 일시에 석방했을 때 그 여파로 한민족의 항일기세가 촉발될까 우려하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특히 위와 같이 최익현의 대마도 현지 순국으로 국내의 커다란 반향을 경험한 일제로서는 이후 의병의 유폐 사실을 유야무야 무마하고 희석시키기 위해 치밀한 계산 하에 수차에 걸쳐 단계적으로 의병들을 석방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석방의 기준이 된 것은 형량과 수감자세 등 두 가지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19)
참고 자료
박민영, 『한말 중기의병』한국독립운동의 역사10,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박민영, 「한말 의병의 대마도 피수 경위에 대한 연구」, 『한국근현대사연구』37, 한국근현대사학회, 2006.
박민영, 「한말 대마도 피수 의병의 유폐생활」, 『한국독립운동사연구』27,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