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반도에서 구석기 시대
2. 신석기 시대
3. 원시공동체하의 인류
4. 청동기시대
5. 초기철기시대
6. 국가형성의 과정에 대한 해석
본문내용
1. 한반도에서 구석기 시대
동북아 구석기 연구는 1929년 북경원인의 화석발견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현재 가장 오래된 유적은 약 100만년 전으로 추정되는 섬서성 藍田유적 등이다. 한국에서는 1962년 함경남도 웅기 굴포리, 1964년 공주석장리 유적이 처음 발견되어 현재까지 약 1,000개의 유적이 확인되었고 임진-한탄강 유역에 50여 개의 유적이 밀집분포하고 있다.
1) 기간 : 현재 구석유적 중 플라이스토세1) 전기(약170~73만년)로 소급되는 유적은 확인되지 않고 플라이스토세 중기(약73~13만년)으로 소급할 수 있을 지 여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교과서에는 구석기의 존속기간을 70만년~1만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2) 시기구분 :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 그러나 객관적 구분의 근거가 취약해 석기를 다듬는 수법에 따라 구분할 뿐.
가. 전기 : 대형석기
나. 중기 : 격지2) 석기가 증가
<중 략>
인구증가와 농경의 확대는 다른 한편으로 읍락의 형성을 가져왔다. 읍락의 형성은 두 가지 원인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안정적인 농경을 위해서는 물의 확보가 매우 중요하였고 이는 관개시설의 확충을 통해서 이루어 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계시설의 확충은 대단위 노동력이 필요한 것으로 하나의 취락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이에 대해 한반도에서는 소규모 하천을 중심으로 도작이 행해졌으므로 대규모 관개가 중요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음-김범철) 둘째는 농경을 통해 획득한 생산물을 지키는데 있어서 협동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취락에서 생산된 잉여생산물은 창고에 저장되었고 이를 노리는 다른 집단들은 존재하였던 것이다. 실재로 청동기 시대로 들어서면서 무기류가 많이 출토된다. 이러한 사실은 부여 송국리에서 발견된 木柵 環濠등과 같은 취락방어시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취락들이 결합하여 형성된 읍락 내부에는 취락간의 격차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한 읍락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 취락과 부차적 위치를 차지한 취락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창원 진동리 유적과 신촌리 유적의 경우 진동리의 고인돌에서는 비파형동검 1점, 마제석검 1점등이 출토된 반면 신촌리의 고인돌에서는 석기류, 어망추등 빈약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이 두 지역 간의 우열을 가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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