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과 장미전쟁과의 상관관계
- 최초 등록일
- 2012.06.13
- 최종 저작일
- 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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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프랑스와 영국 두 나라 사이에 100여 년간 걸칠 전쟁으로 씻을 수 없는 불신과 깊은 원한의 도랑을 만든 백년전쟁, 또한 영국의 왕권 약화로 귀족의 힘이 강대해져 벌어지는 장미전쟁. 다른 시대, 장소에서 벌어진 이 두 전쟁은 각기 다른 성격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언뜻 보기에 그 연관성을 찾을 수 없지만 전쟁 전후의 과정과 상황들을 살펴보면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의 상관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두 전쟁사이의 미묘하게 얽힌 고리들을 풀어봄으로써 두 전쟁사이의 상관관계를 알아보고자 한다.
목차
Ⅰ. 序論
Ⅱ. 本論
1.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의 일반적 개관
1) 백년전쟁의 일반적 개관
2) 장미전쟁의 일반적 개관
2.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둘러싼 諸問題
1) 당시 유럽의 정세
(1) 13~14세기 초의 유럽 정치의 주류와 영국&
(2) 13~14세기 유럽의 변화와 영국 정세
2) 교황권의 쇠퇴
(1) 서임권 투쟁, 보니파키우스 8세 Vs 필립 4세
(2) 아비뇽 유수와 서방대분열
3) 경제적 변화
(1) 중세 후기의 경제 사회적 조건과 그 관계 분야의 전개
(2) 영국의 부 축척방법의 변화
4) 왕위계승분쟁
(1) 분쟁의 시작
(2) 장미전쟁의 서막
(3) 장미전쟁의 전개
5) 장미 전쟁의 종결
Ⅲ. 結論
본문내용
本論
1.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의 일반적 개관;
1) 백년전쟁의 일반적 개관;
영국은 1066년 노르만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 내부에 영토를 소유하였기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오랫동안 분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328년 프랑스 카페왕조의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자, 그의 4촌 형제인 발루아가(家)의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에 대하여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모친이 카페 왕가 출신(샤를 4세의 누이)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王位)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양국간에 심각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플랑드르에 수출해오던 양모(羊毛) 공급을 중단하고, 그 보복으로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인 기옌, 지금의 가스코뉴 지방의 몰수를 선언하였으며, 1337년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공식적인 도전장(挑戰狀)을 띄우게 되었다.
<중 략>
結論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단순히 생각하자면, 프랑스와 달리 백년전쟁을 거치면서 득세한 대귀족들이 제거되지 못했기 때문에 귀족들이 일으킨 장미전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둘러싼 여러 가지 고리들은 꼭 앞에 언급한 이유가 다른 여러 가지 접근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당시 유럽의 정치적 주류인 왕권의 강화이다. 이 왕권은 귀족들을 누르는 것에도 의미가 있지만 교황에 반대하여 자신의 권력을 점층적으로 늘려가기 위한 노력에 더 의미가 있다. 즉 교황의 기득권을 왕이 빼앗는 의미인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