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기묘 7월 16일. 대한국 황해도 성은 안이고 이름은 중근 자는 응칠(성질이 가볍고 급한 편이므로 이름을 중근이라 하고, 배와 가슴에 검은 점 일곱 개가 있어 자를 응칠이라 함)이라 하였다. 중년에 과거에 올라 진사(進士)가 되고, 조씨에게 장가를 들어 배필을 삼아, 3남 1녀를 낳았다. 맏이는 중근, 둘째는 정근, 셋째는 공근이다. 안중근은 어려서부터 특히 사냥을 즐겨, 언제나 사냥꾼을 따라다니며, 산과 들에서 사냥을 하였다고 한다. 장성해서는 사냥하느라 학문에 그다지 힘쓰지 않았다.
1894년 갑오 안중근의사 나이 16세로, 아내 김씨에게 장가들었다.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이 시기에 한국 각 지방에서는 이른바 동학당(한일합병 전 일진회의 근본 조상)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외국인을 배척한다는 핑계로 군현을 횡행하면서,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했다.(이때 한국이 장차 위태롭게 된 기초가 만들어졌다.) 안중근의 아버지는 동학당의 폭행을 견디기 어려워 동지들을 단결하고 격문을 뿌려 의거를 일으켰다. 이때 안중근은 아버지를 도와 사병을 이끌고 적을 물리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무렵 안중근의 아버지는 널리 복음을 전파하고 원근에서 권면하여 입교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갔다. 안중근의 가족들도 모두 천주교를 믿게 되었고 안중근 또한 역시 입교하여 프랑스 사람 선교사 홍신부 요셉에게서 영세를 받고 성명을 도마라 하였다. 또 한, 안중근은 홍신부에게서 프랑스어를 몇 달 동안 배우면 지내었다.
그후 홍신부와 안중근이 의논하여 그 당시 학문에 어두웠었던 한국 교인들을 위하여 민주교에 요청하여 대학교를 설립하여 줄 것을 요청 하였으나 거절당하여 외국인들을 믿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이에 대하여 어떤 벗이 “무슨 이유로 배우지 않는가?”에 대하여 이런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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