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2차 세계대전 전,후의 유럽정치
- 최초 등록일
- 2011.08.14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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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1차 세계대전 전 부터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까지의 유럽정치변화에 대해 작성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Ⅰ.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정치·외교상황
1.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럽
2. 제1차 세계대전의 불꽃 -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 암살 사건
Ⅱ. 제1차 세계대전과 종전 후의 정치·외교 상황
1. 제1차 세계대전 전개와 종전
2. 파리강화회의와 베르사유 체제
3.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각 나라의 변화
(1) 미국과 영국
(2) 프랑스
Ⅲ.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정치·외교상황
1. 소련의 성립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등장
2. 히틀러의 등장과 나치즘
3. 이탈리아와 독일로 인한 긴장감 고조
Ⅳ. 제2차 세계대전과 종전 후의 정치·외교상황
1. 제2차 세계대전의 전개
2. 종전 후 상황에 대한 협의
Ⅴ. 유엔의 성립과 냉전의 수립
본문내용
Ⅰ.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정치·외교상황
1.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럽
1914년 역사상 유래 없는 전 세계적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정치상황은 마치 소용돌이에 휩싸인 배 같이 혼란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1900년대 이후부터 서양의 각 국은 제국주의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아프리카와 아시아는 서유럽 국가들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제국주의적 경쟁과 함께 유럽의 위기를 조성한 것은 서유럽 국가 상호간의 군비경쟁이었다. 이런 군비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로 나타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영국과 독일간의 군비경쟁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해군의 증강을 들 수 있다. 독일은 내륙국가 이기 때문에 강력한 해군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독일의 해군 증강정책은 영국의 해군에 대한 견제 정책으로 육성한 것이었다. 따라서 독일의 해군력 증강은 두 나라의 관계를 더욱 악화 시키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원인들은 앞서 말한 군비경쟁을 포함한 모로코사건, 발칸반도의 소수민족문제 그리고 범슬라브주의를 말할 수 있다. 군비경쟁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하였기 때문에 중복해서 다루지는 않겠다.
모로코 사건은 모로코에 대한 독일과 프랑스의 모로코에 대한 영유권 다툼으로 해석 할 수 있다. 프랑스는 모로코의 영유권을 암묵적으로 가지고 있었고 서유럽 국가들도 이를 인정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는 프랑스의 모로코 영유권 주장에 대해 간섭하기로 하고 1905년 탕히에(Tangier)를 방문하여 모든 나라가 모로코의 독립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프랑스정부는 독일의 요구를 반영하여 모로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국제회의 개최에 찬성하였다. 1906년 스페인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서유럽 각 국가의 대표들은 모로코 독립에 대해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모로코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스페인과 함께 외국인을 보호하고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모로코의 경찰권을 보유 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1907년 질서 유지를 위한 군대를 파견하고 1908년 탈영병을 수색하다는 명목으로 독일 영사관에 침입하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와 독일의 갈등관계는 심화되었다. 1911년 제2차 모로코사건이 일어나 또다시 전쟁 위기가 고조 되자 프랑스는 내국인 보호라는 구실로 모로코에 군대를 다시 파견하였고 이에 독일도 모로코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 때 영국이 프랑스를 지지하고 나서자 독일은 모로코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서 독일과 영국, 프랑스 간의 갈등의 골은 깊어져만 갔다.
참고 자료
차하순,『새로 쓴 서양사총론2』, 탐구당, 2010
배영수,『서양사 강의』, 한울아카데미, 2007
윤승준,『하룻밤에 읽는 유럽사』, 랜덤하우스코리아,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