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체제의_형성과_성격_및_구조
- 최초 등록일
- 2011.06.24
- 최종 저작일
- 2011.03
- 8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500원
소개글
비엔나체제의_형성과_성격_및_구조
목차
Ⅰ. 서론
Ⅱ. 비엔나회의의 개최 과정
Ⅲ. 비엔나회의(1814~1815)
Ⅳ. 비엔나체제(유럽협조체제)의 발전 과정
Ⅴ. 비엔나체제의 의의
Ⅵ.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국제정치는 수차례의 전쟁과 그 후 평화를 꾀하기 위해 성립된 국제체제의 특성 속에서 발전하여 왔다. 국제사회는 전쟁을 겪으며 국가들의 영토를 확정하였고, 국가 간 관계의 새로운 틀을 형성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비엔나체제,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집단안보체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얄타체제 등이 국제사회의 형성을 주도해 온 국제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기택, 『현대국제정치이론』(서울: 박영사, 1997), pp. 42~43.
이들 체제 중 비엔나체제는 1814년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비엔나회의를 통해 도출된 것이다. 오늘날 국제정치 구조의 성격은 비엔나회의의 결정들로부터 유래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김용구, 『춤추는 회의-비엔나회의 외교』(서울: 나남출판, 1997), p. 21.
따라서 세계외교사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비엔나회의와 그에 따른 비엔나체제를 검토 · 파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본 발제문에서는 나폴레옹 전쟁과 그 후속처리 과정인 비엔나회의, 그로부터 도출된 비엔나체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비엔나회의의 개최 과정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럽사회는 세력균형체제를 통해 질서를 이루고 있었다. 세력균형 원칙의 핵심적인 내용은 5개국 정도의 비슷한 세력의 강대국이 병존하며 유럽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국가들은 그들 중 어느 국가가 타국을 제패하고자 하는 위협적인 입장을 취할 경우 연합하여 이에 대처하며 유럽의 평화를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정치의 원칙은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위협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발생한 후 프랑스의 외교관들은 공화정과 국민을 대표하는 지위를 지녔다고 자처하며 군주제를 대변하는 다른 국가의 외교관들과의 차별화를 꾀했다. 혁명 프랑스의 새로운 외교로 인하여 대두된 ‘국민주권’ 이론과 루이 16세 일가의 도피 · 발각으로 인해 프랑스와 다른 국가들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1791년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는 프랑스 왕가의 안전을 위해 공동으로 대처할 것을 결의하고 이듬해 대(對)프랑스 동맹을 체결하였다. 두 달 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했고 이로써 20년 간의 나폴레옹 전쟁이 시작되었다.
혁명 프랑스는 발미 전투에서 첫 승리를 거둔 뒤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하였으며,
참고 자료
김용구. 『세계외교사』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06.
. 『춤추는 회의-비엔나회의 외교』서울: 나남출판, 1997.
백봉종. 『현대 지구촌 외교사』서울: 선인, 2001.
오기평. 『세계외교사-세기를 넘기면서-』서울: 박영사, 1985.
이기택. 『현대국제정치이론』서울: 박영사, 1997.
○ 논문
이병희. “집단안전보장: 역사적 변천과정.” 『한국정치학회보』서울: 한국정치학회. 제37집 5호. 2003.
전재성. “19세기 유럽협조체제에 대한 국제제도론적 분석.” 『한국과 국제정치』창원: 경남대학교 출판부. 31호.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