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침묵과 열망 - 황우석 사태 7년의 기록>
Ⅰ. 과학기술동맹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균열과 붕괴
1. 시작
1999년 황우석 교수는 한국최초의 복제소 ‘영롱이’와 ‘진이’를 탄생시키면서 동물복제 전문가로서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 그리 ‘올해의 과학자상’을 포함해 수많은 상을 탔으며 스타과학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또한 무엇보다도 그로 인하여 인적 네트워크가 광범위하게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정부, 정치, 언론, 학계, 기업 등 황우석 교수를 중심으로 일명 과학기술동맹이 형성된 것이다. 정부는 그의 성공을 토대로 하여 자신의 정권을 확고히 하려고 하였으며 언론은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떠받들어 국민들의 관심을 그의 행보에만 두게 하였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그와의 관계를 통하여 국민적인 관심을 받고자 하였으며, 학계는 황우석이라는 명분아래 자신들의 연구에 유용한 생명윤리법안을 만들고자 하였다. 또한 기업들은 막대한 연구비를 지원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충족시키고자 하였다. 황우석 교수는 이러한 이해관계를 이용하여 자신을 연구에 필요한 막대한 연구비는 물론 정당성 또한 가질 수 있었으며 국가적인 영웅으로서 대접받았다.
황 교수의 연구에 정부가 큰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생명윤리법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우여곡절 끝에 2003년 12월 29일 국회는 <생명윤리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서는 결국 인간배아복제를 허용하고 있었다. 특히 부칙 3항은 황우석 교수만이 빠져 나갈 수 있는 구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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