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마의 모든 것
- 최초 등록일
- 2011.06.20
- 최종 저작일
- 20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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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페르마라는 수학자에 대해 자세히 소개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Ⅰ. 페르마의 생애
Ⅱ. 페르마의 수학적 업적
ⅰ) 확률론
ⅱ) 미분, 곡선
ⅲ) 해석기하학
ⅳ) 기하
ⅴ) 정수론
Ⅲ. 마치며
※ 참고 :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사이의 관계
-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페르마의 생애
피에르 드 페르마 Pierre de Fermat
(1601. 8. 17 프랑스 보몽드로마뉴~1665. 1. 12 카스트르)
- 관료로서의 삶 : 페르마라는 사람은?
피에르 드 페르마는 보몽의 부영사의 아들 피혁상인 도미니크 페르마와 의회 집정관 가정의 딸 크레르 드롱 사이에서 1601년 8월 프랑스 보몽 드 로마뉴(Beamont-de-Lomagne)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집안 덕분에 페르마는 랑셀브의 파랑시스캉 수도원에서 부잣집 자녀들만이 받을 수 있는 고급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그 뒤에는 툴루즈 대학에 진학하였다.
법률학사학위를 받은 다음 변호사로 일하다가 30세인 1631년 5월 14일 툴루즈의 청원위원(請願委員)이 되었다. 페르마의 주된 업무는 서민들의 이야기를 국왕에게 전달하는 것과 국왕의 포고령을 전국 각지에 분명하게 전달하고 그것이 정상적으로 이행되도록 감독하는 일이었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매우 인정 많고 경우 바른 유능한 공무원이었다고 한다.
페르마는 재판과 관계된 업무도 맡고 있었다. 또한 페르마는 빠른 속도로 출세 가도를 달린 끝에 드디어 사회의 최고 신분 계층에 들게 되었으며 그의 이름 사이에 ‘de`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토록 출세를 한 이유는 그의 야망 때문이 아니라 건강한 육체 덕분이었다. 당시 전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으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죽어나갔기 때문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승진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페르마는 툴루즈의 청원위원이 된 해인 1631년 6월 1일에 이종 사촌인 루이스 드롱과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는데, 이 중 클라망 사뮤엘은 부친의 과학 계승자(페르마가 죽은 후에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기록한 책을 발간함)가 되었고 두 딸은 수녀가 되었다.
페르마는 이어 1648년부터는 툴루즈 지방의회에서 왕의 고문인 칙선의원(勅選議員)이 되어 생애를 마칠 때까지 그 직에 종사하였다. 이 지위는 페르마의 권위, 청렴, 그리고 위대한 능력 덕분에 17년 동안 지속되어 페르마는 거의 35년 동안 주 지방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였다. 1652년에는 흑사병에 걸려 상당히 위험한 지경까지 갔었는데, 이 때문에 한 때 페르마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페르마는 1665년 1월 12일 카스트르에서 6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떠나기 3일전 한 소송 사건을 마무리 했었다.
그리고 페르마는 17세기 정치적 위기 속에서 음모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했다. 그는 정치적 야심을 모두 포기하고, 의회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대신 페르마는 자신의 열정을 수학에 쏟아 부었다. 페르마는 재판 업무를 처리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오로지 수학에만 매달렸다.
참고 자료
교과서를 만든 수학자들. 김화영. 2005, 도서출판 글담
수학자도 사람이다! 1 루타 라이머,윌버트 라이머 2007, 이론과실천
고독한 천재들 E.T.Bell 2006, 영남대학교 출판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사이먼 싱, 1998, 영림 카디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