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광과 지봉유설
- 최초 등록일
- 2011.02.03
- 최종 저작일
- 20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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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수광의 생애와 그의 문학관을 지봉유설을 중심으로 정리한 레포트
목차
Ⅰ. 이수광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
1. 이수광의 생애
2. 시대적 배경
Ⅱ. 이수광의 학문과 사상
1. 문학관
(1) 시론
(2) 문장론
2. 학문관
Ⅲ. 이수광의 저술활동
1. 지봉유설
2. 승평지
3. 경학 관련 저술
4. <중흥장소>와 시문들
본문내용
1.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의 생애
이수광은 조선 중기의 관리이자 학자로서,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이었다. 본관이 전주(全州)였던 그는 병조판서였던 이희검(李希儉)의 아들이었으며, 어머니는 문화 유씨였다. 16세 때 초시(初試)에 합격하였던 그는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였으며, 20세에는 진사(進士)가 되었다. 23세 때인 1585년(선조 18년)에는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로 벼슬길에 나섰다. 27세 때에는 성균관 전적을 역임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는 호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냈으며 또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년)에는 30세의 나이로 경상도 방어사 조경의 종사관으로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용인 전투에서 패하였다. 아군의 패배 소식을 들은 그는 의주로 돌아가 북도 선유어사(宣諭御史)가 되어 함경도 지방의 선무활동(宣撫活動)에 공을 세웠다. 35세 때인 1597년에 그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는데, 바로 이 해에 정유재란과 함께 또 명나라 연경에서는 궁전이 불타는 사건이 일어나자 진위사가 되어 두 번째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이 때 그는 연경에서 안남 사신을 만나 회답하면서 교유하였다고 한다. 그 후 그는 39세에 부제학(副提學)으로 《고경주역(古經周易)》을 교정하였고, 또 그 이듬해 《주역언해(周易言解)》를 교정하였으며, 41세에는 《사기》를 교정하였다. 또 43세 때인 1605년(선조38년)에는 조정 관료들과 뜻이 맞지 않아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갔다가, 그 이듬해에 병 때문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참고 자료
김용희, 「〚지봉유설〛에 나타난 이수광의 자연관」, 춘천교육대 교육대학원, 2005
김원준, 「芝峰 李睟光의 문학관과 시평양상」,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4
한영우,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 경세원, 2007
신병주,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