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중근 의사의 활동
2. 안중근 의사의 저서
3. 김구와의 인연
4. 순국
5. 보물로 지정된 유묵
6.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대한 국내의 반응
7.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대한 국외의 반응
본문내용
안중근(安重根) -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 본관은 순흥, 고려조 명현 안향의 26대손.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에서 현감 안인수의 손자이자 진사 안태훈의 장남으로 태어남.
- 안응칠(安膺七)이라는 아명으로도 불림.
- 대한제국의 교육가, 독립운동가, 대한의병 참모중장.
- 천주교 성당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1895년 천주교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과 프랑스어를 배움.
-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해 독립운동에 투신함.
-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에 힘쓰다 1907년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함.
- 1909년 10월 26일에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
-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세례명은 토마스,
그래서 안중근 토마스라고도 불림.
1. 안중근 의사의 활동
1) 항일 계몽운동
안중근은 고종황제가 퇴위되고 군대가 강제해산 당하자 동지들과 함께 그에 대한 방책을 협의하였다. 안중근은 이 때 항일계몽운동의 적극적인 방략으로 의병을 일으켜서 독립전쟁을 준비하자는 `독립전쟁전략`을 주장했으며 그 전략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골자로 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요지의 안중근의 독립전쟁전략은 1907년 당시 상황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국내의 의병운동은 현대식 병기의 절대적부족과 의병들의 군사훈련 부족으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안중근은 국내에서의 항일 계몽운동을 중단하고 국내에서의 전략에 대한 한계점을 느끼고 의병부태를 창설하기 위해 러시아 땅 블라디보스톡을 향하여 망명의 길을 떠나게 되는데 이 때 안 의사의 나이 2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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