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의 무역사상
- 최초 등록일
- 2010.10.07
- 최종 저작일
- 20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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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I. 장보고의 출현과 해상무역
1. 장보고의 출현
청해진(淸海鎭) 대사 장보고(張保皐)는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에 이름이 궁복(弓福),성은 장씨(張氏)라 하였고, 삼국유사에는 궁파(弓巴), 중국사료(中國史料)에는 장보고(張保皐), 일본사료에는 장보고(張寶高)라 기록되어 있다. 그는 어렸을 때의 이름이 궁파(弓巴), 궁복(弓福)라 하였으며 활 잘 쏘는 특기와 지략을 소유한 인물이었고, 또한 궁마에 재질이 뛰어난 바닷가의 무인(武人)가문에 태어났다.
목차
I. 장보고의 출현과 해상무역
1. 장보고의 출현
2. 청해진의 설치
II. 장보고의 해상활동
1. 장보고의 무역로
2. 해상세력의 기반
3. 장보고의 해상활동
III. 신라시대의 무역활동
1. 중국과의 교역
2. 일본과의 교역
3. 중동아시아-이슬람과의 교역
IV. 장보고의 몰락과 신라의 사무역
1. 장보고의 몰락과 청해진의 붕괴
2. 청해진이 소멸된 후의 사무역
V. 참고문헌
본문내용
IV. 장보고의 몰락과 신라의 사무역
1. 장보고의 몰락과 청해진의 붕괴
장보고는 김우징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음을 이유로 해서 정부에 불복했고 결국은 846년에 왕실의 사주를 받은 무주 재지세력 출신의 염장에 의해서 허망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장보고의 죽음은 단순히 염장의 배반 때문이었다기 보다는 그가 형성해온 해상 세력에 대한 신라귀족들의 시기와 두려움의 소산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부장(副將) 이창진(李昌珍)등이 정부에 대항하였으나 실패하고 무진주일가가 된 염장에게 평정되고 청해진은 파괴되었다. 그 후 유민(遺民)들은 박해를 피하여 일본으로 건너 갔으며 남은 백성들은 문성왕(文聖王) 13년(851) 2월에 전라도(全羅道) 벽골군(碧骨郡, 現 金堤郡)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김제는 시조(始祖) 유(儒)의 출생지인 흥덕과, 중시조(中始祖) 영(英)의 출신지인 용안(龍安)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이라는 것은 흥성장씨(興城張氏)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장보고(張保皐)의 자손(子孫)들이 살아 있었다면, 벽골군(碧骨郡)으로 이거(移居)했을 것이고, 은인자중하면서 훗날을 기약했을 것이다.
장보고에 대한 신라 귀족들의 명칭이`해도인`이었고 장보고가 죽은 후 일본에 있던 장보고의 부하도 철저히 색출하고 청해진을 아예 없애버린 처사(문성왕 13년)를 볼 때 귀족들이 장보고를 우두머리로 한 해상세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2. 청해진이 소멸된 후의 사무역
장보고 사망 후에도 청해진의 회이사는 일본에 파견되었다. 장보고가 사망하고 청해진이 파멸되었다고 해서 신라인의 해상활동의 기세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장보고의 사망과 청해진의 괴멸은 우리 무역사에 있어서 실로 큰 사건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장구한 기간에 배양된 해상활동의 소지는 일시에 근절될 수는 없다. 당은 서기 907년에 멸망하는데 그 전해인 효공왕 10년(A.D906)에 신라가 견사하고 그후 경명왕 7년 (A.D 923)에 신라가 후당에 견사하기까지의 10여년간은 중국과의해상교통, 무역이 두절된 것처럼 보인다.
참고 자료
1. 김신, 한국무역사, 도서출판 석정, 1991. 6.
2. 김광수 외, 장보고의 신연구, 완도문화원, 1985.
3. 김문경 외, 장보고 해양경영사 연구, 이진출판사, 1993
4. 손보기 편, 장보고와 청해진, 혜안, 1996.
5. 한국무역협회 www.kita.or.kr
6. 해상왕 장보고 기념사업회 www.changpog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