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이황과 성리학
- 최초 등록일
- 2010.07.01
- 최종 저작일
- 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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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과제로 했던거에요. A+받은 레포트구요. 참고로만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혹시 공학윤리 들으시는 분, 똑같이 하시면 점수 안나옵니다.
목차
1. 양심선언
2. 이퇴계의 생애
3. 주요저서
4. 윤리사상
5. 가장 감명 깊은 부분
6. 과제를 마친 후 소감
7. 참고문헌 및 사이트
본문내용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에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안동시 도산면 온혜동)에서 아버지 진사 이식(李埴)의 넷째로 태어났다. 퇴계가 출생한 다음해 6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21세 때 부인 허씨(許氏)와 결혼하여 24세 때 아들 준을 낳았다. 27세에 부인 허씨(許氏)가 죽는 등 두 번 부인을 잃었고, 48세에는 둘째 아들이 죽었으며, 50세에는 친형이 사화(士禍)에 연루되어 장살(杖殺) 당하는 등 불행한 일도 많았다. 사화로 얼룩진 당시의 시대 상황과 이러한 개인사는 이황의 학문적 정향(定向)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황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학구열이 있었다. 퇴계가 글을 읽기 시작한 것은 여섯 살 때부터였는데 이웃의 천자문을 해독할 줄 아는 늙은이를 통해 천자문을 배우고 12살 때 숙부 우에게서 『논어(論語)』를 배웠다. 20세 때에는 『주역(周易)』을 읽고 그 뜻을 강구하기에 거의 침식을 잊어가며 독서와 사색에 잠기어 위장병을 얻을 정도였다고 한다. 24세 때 서울로 올라와 태학에 유학하였고 27세 때 경상도 향시의 진사시에 응하여 수석을 차지하고 생원시에서는 2등으로 합격했으며, 이듬해 봄에는 진사회시에서 2등으로 뽑혔다. 32세에는 문과 별시에 응하여 제2인으로 합격했고 33세 때에는 경상도 향거에 응하여 제1인에 천거되었다. 34세 때에 대과에 급제하여 이로부터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
이황이 학문을 온축하고 발휘한 때는 대개 벼슬에서 물러난 50대로부터 60대이며, 변론·저술·편찬 등의 중요한 것이 대부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계몽전의(啓蒙傳疑)』,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심경석의(心經釋疑)』 및 고봉 기대승(奇大升)과의 사칠론변(四七論辨)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성학십도(聖學十圖)』는 퇴계 만년의 가장 의미있는 저작이다.
참고 자료
1)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심산문화, 2003
2) 최중석, 『나정암과 이퇴계의 철학사상』, 심산문화, 2002
3) 이상은, 『퇴계의 생애와 학문』, 예문서원, 1999
4) 이응덕, 『퇴계 이황의 윤리교육사상 연구』, 원광대학교, 2002
5) 윤사순, 『퇴계학 연구논총 제3권 ‘退溪李滉의 인간관’』,경북대학교퇴계연구소, 1997
6) 최재목, 『쉽게 읽는 퇴계의 성학십도』, 예문서원,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