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재조명 - 흥선대원군 / 명성황후 / 고종
흥선대원군, 명성황후, 고종의 정치적 관계, 역사적 평가, 행적
목차
● 조선시대가 처한 시대적 배경
● 흥선 대원군 (1820~1898)
1) 흥선대원군 행적
2) 흥선대원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
● 명 성 황 후 (1851~1895)
1) 명성황후 행적
2)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
● 고 종 (1852~1919)
1) 고종 행적
2) 고종에 대한 역사적 평가
● 흥선대원군 vs 명성황후․고종
1) 흥성대원군과 민비의 첫 갈등
2) 민비의 공작으로 흥선대원군 실각
3) 흥선대원군과 민비의 반격과 반전
4)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그리고 고종의 정치적 관계
본문내용
조선시대가 처한 시대적 배경
그 당시 배경은 수세기 동안 통치의 규범으로 삼아 왔던 중국 중심의 중화(中華) 질서와 성리학적 사상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전제군주제와 신분제가 밑에서부터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외세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질서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지고 있던 때였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성행하던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대원군이 집권하던 때는 안동(安東) 김씨(金氏) 가문이 정권을 잡고 온갖 세도를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 후에 핍박해질대로 핍박해진 민중의 생활과 신분제도의 몰락, 왕권의 침체, 관직의 매관매직으로 인한 지배체제의 붕괴등 조선시대를 떠받들어온 모든 제도, 이념, 가치 등이 무너진 시대였다. 나라 외적으로는 서구 열강들의 동아시아에 대한 야욕을 숨기지 않고 있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거문고 사건, 그리고 중국은 아편전쟁) 1854년에 서양에 문물을 개방한 일본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시기였다. 대원군의 등장으로 사실상 세도정치는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그가 물러나자마자 왕비의 사촌 형제들과 조카들을 비롯한 여흥(驪興) 민씨(閔氏)들이 권력을 독점해 버린 사실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또한 강화도 조약을 맺은 후 조선에서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것이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가진 개화파와 나라가 망하는 징조라며 개화파를 가리켜 외국에 나라를 파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면서 외국과 교섭하기를 반대하는 주장이 대립하였다. 그러나 개화를 주장하는 세력이 강해져 개항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렇듯 조선 전체가 격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어 조선은 어디로 뱃머리를 돌려야 할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운 시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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