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전사 수송 사례
- 최초 등록일
- 2010.04.25
- 최종 저작일
- 2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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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항공전사에서 수송분야에 관련된 사례들을 정리해 놓았습니다.
목차
1. 전쟁의 배경
2. 전쟁의 과정
3. 교훈 분석
본문내용
2001년 9.11테러 사태가 발생하자, 미국은 2차대전을 촉발시킨 진주만 사건과 비교하면서 이라크를 테러 사태의 지원국으로 지목하였다. 1991년 4월 걸프전쟁이 종결된 이후, 이라크는 미국으로부터 대량살상무기(WMD)를 개발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고 UN안보리의 사찰 요구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라크는 자국에 대한 금수조치의 해제 없이는 사찰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라크와 미국의 관계가 계속 악화되고 있던 2002년 1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이라크를 이란 및 북한과 함께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악의 축`에 포함시켰다. 이때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가 보유하고 있는 대량살상무기의 위협성을 강조하면서 후세인 정권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 해 9월, 부시 대통령은 유엔 총회 연설을 통해 이라크에 WMD 즉각 폐지, 테러지원 중단, 국민억압 중지 등 5개항을 요구하며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후세인 정권을 축출하겠다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국가안보전략보고서를 통해 테러세력의 본거지와 지원세력에 대하여 선제행동을 취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하였다.
2002년 11월, UN이 안보리 결의 1441호를 채택함으로써 이라크에 대한 사찰이 이루어졌다. 2003년 1월, 사찰이 만족스럽게 진행되지 않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후세인 정권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표명한 가운데, 후세인 정권의 자발적인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부시 대통령은 후세인이 거부할 경우, 무장해제를 위해 군사적으로 공격하겠다고 공표하고, UN 사찰단이 이라크의 WMD 활동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자, 후세인에게 최후의 통첩을 발송하였다. 3월 18일, 후세인은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3월 20일,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함으로써 이라크 전쟁은 시작되었다.
전쟁은 미영 연합군이 후세인 정권의 근거지인 바그다드의 티크리트를 함락시키고 미 국방부가 대규모 전투의 종결을 선언한 4월 14일까지 26일간 진행되었으며, 연합군의 작전 수행 형태에 따라서 아래와 같이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사. 다출처 첩보를 활용한 정보력의 향상
이라크전쟁에서는 전 전장을 가시화하기 위해 다양한 우주 및 항공자산을 운용하였다. 걸프전쟁에서 사용된 무인정찰기는 ‘파이오니어(Pioneer)’ 정도였으나 이라크전쟁에서는 10종류 이상의 무인정찰기를 투입하였다. 아프간전쟁에서도 사용하였던 ‘글로벌호크(Global Hawk)’, ‘프레데터(Predator)’ 및 ‘포인터(Pointer)’ 이외에 미 육군의 ‘헌터(Hunter)’와 ‘세도우(Shadow)’, 미 해병대의 ‘드레곤 아이(Dragon Eye)’ 및 미 공군의 ‘Force Protection Surveillance System’ 같은 전술무인기를 사용하여 임무를 수행하였다.
무인정찰기뿐만 아니라 E-2C, EP-3E, EA-6B, U-2, AWACS, RC-135, J-STARS 같은 항공자산 및 군사위성체계를 활용하여 정보를 수집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걸프전쟁시는 표적탐지능력이 15% 정도였으나 이라크전쟁에서는 표적탐지능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어 70% 이상으로 추정되었다.
수집된 정보를 디지털화된 C4ISR의 네트워크로 연결 전장정보를 공유한 가운데 미 본토에서부터 영국, 독일, 중동 지역까지 지리적으로 분산되어 있는 전력이나 부대를 전장으로 전개시키지 않고도 다수의 상이한 지역표적에 대해 전력을 집중시켜 동시 공격을 수행,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