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칠지도를 백제와 왜의 관계에서 바라보고, 그 정의와 성격, 용도 등 의미를 고찰한 후에 명문에 대한 해석의 차이를 소개합니다. 마지막으로 보고서를 마치며 이러한 해석의 차이에 대해 나름의 시각을 싣습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본론
2-1. 백제와 왜와의 관계
2-2. 칠지도의 정의, 성격과 용도
2-3. 칠지도에 나타난 백제의 천하관
2-4. 칠지도 명문에 구체적 해석
2-5. 칠지도 명문에 대한 각국의 입장 차이
3. 나가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1945년 이전까지의 연구는 일본서기의 신공황후기에 언급된 칠지도가 실제로 존재함으로 일본서기와 신공황후에 대한 신빙성을 증명하는 것에 사용되었다.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에 대한 증거로 채택되어 한반도 병합의 역사적 이유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칼이 너무 오래되고 부식되어 철의 녹과 상감의 박락 때문에 알아볼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이에 칠지도 명문에 대한 해석이 본격화된 것은 1945년 이후 일본 학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들의 연구에 따라 명문이 61자인 것이 확인되었고, 이 칠지도가 한일 고대사의 중요한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사료로서 가치가 인정되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로 일본 학자들은 《일본서기》(니혼쇼키) 신공기 52년조에 언급되고 있는 "칠지도"로 해석하여 이 칼이 백제왕이 일본 천황에게 헌상했다고 주장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이 칠지도가 연구되지 않았으나 1963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대학의 김석형이 오히려 이 칼의 명문을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고 고대 삼국이 일본(당시 왜)에 식민지 국가인 분국을 세웠다는 이른바 삼국분국설을 주장하면서 주목받게 되었다. 김석형은 1963년에 발표한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에 대하여〉라는 논문과 이 논문을 보완하여 1966년에 발표한 《초기조일관계사》라는 저서에서 칠지도가 백제 왕이 일본 천황에게 바쳤다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부정하고 오히려 백제왕이 일본 천황에게 하사했다고 주장했다. 김석형의 삼국분국설은 현재 많은 부분이 수정되거나 파기되었지만, 백제왕이 칠지도를 하사한 것이라는 학설은 남북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최근 열린 한일관계사학회에서 홍성화 고려대 동아시아교류연구소 연구원이 발표한 논문(‘
3. 나가며
본 보고서를 마치며, 보고서의 작성자는 백제의 칠지도에 대해 나름의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칠지도는 근초고왕 시절인 약 369년경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칼로, 당시 역사적 상황은 한창 전성기 시절인 백제가 고구려와 신라를 압박해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왜의 경우 국가적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그러므로 백제가 왜에게 바쳤다는 일본의 주장은 역사적 상황으로 보았을 때 그릇된 것이다.
둘째로, 당시 철기 기술로 무장한 전성기의 백제가 아직 국가로서의 기틀이 채 잡히지 않은 왜에게 철기 무기를 헌상한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오히려 국력이 약한 왜를 위해 철기 기술을 전파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본다.
셋째로, 당시 유물의 상감 기법 등으로 제작 연대가 6세기로 추정되며 가지가 실제로는 7개가 아닌 6개라는 등 칠지도를 《일본서기》의 내용에 맞추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다음은 《일본서기》의 내용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52년 가을 9월10일 (백제사신) 구저(久底)등은 천옹장언을 따라서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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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종, 『일본역사와 한일관계』, 학문사 1994
김태식, 『광개토왕릉 비문논쟁과 임나일본부설』, 역사비평,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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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배, 1980, 「칠지도 (七支刀) 연구 (硏究) 의 새로운 방향 (方向)」, 동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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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지도’(아사오 나오히로 외 엮음, 이계황 외 옮김, 〈새로 쓴 일본사〉, 창작과 비평사, 2003, 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