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유고슬라비아 전쟁과 대학살
- 최초 등록일
- 2009.12.17
- 최종 저작일
- 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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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지역 연구론- 유고슬라비아의 갈등과 내전의 문제를 인권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레포트
입니다.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려졌던 유고슬라비아 내부 문제를 인권단체,
국제사회의 시각으로도 분석하고 있습니다.
목차
구(舊)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전쟁과 대학살
갈등의 배경
구 유고 슬라비아의 전쟁과 대학살
국제사회의 반응
다자 인권 기관들
인도주의적 원조 \
평화유지활동
새로운 유형과 선례
민족주의와 인권
본문내용
본 레포트는 국제정치 용어에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 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등장시킨 구 유고슬라비아의 잔혹한 내전, 특히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의 내전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을 다룬다.
갈등의 배경
유고슬라비아는 1차 세계대전 종식 후, 이미 이전부터 독립국이던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보이보디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그리고 마케도니아 등의 결합체로 탄생하였다. 이들은 1980년대 후반까지 서로 다른
종족들이 공존하였다.
나치통치하에서 가장 저항세력으로 활동한 공산당은 2차 세계대전 후에 티토의 영도 아래 유고슬라비아를 재건하였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모든 인종집단이 소수민족이었다. 때문에
연방정치체제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의 6개 공화국과 세르비아 내 2개의 자치지역인 코소보와 보이보디나에 실질적인 권력을 인정했다. 코소보 내의 알바니아 인종에 대한 차별을 제외하면, 이 체제는 30년 동안 원한하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1980년 티토의 죽음은 엄청난 갈등과 교착상태가 잠복해 있던 체제에서 마지막 중재자의 소멸을 의미하였다. 동시에 6개의 공화국과 2개의 자치구, 그리고 연방공화국이라는 9개로 분리된 공산관료체제의 수십 년간 축적된 비효율성은 체제의 윤활유 역할을 해온 경제성장을 종식시켰다. 1980년대 중반 무렵에 공산당관료들은 더 이상 해결할 수 없을 정도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세르비아공화국에서 밀로세비치가 자신의 권력 확대를 공고화하기 위하여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이용하기 시작한 1987년부터 위기는 대재앙이 되기 시작했다. 그는 크로아티아에 대한 증오감을 조장하였고 유고슬라비아 전체 인구의 6분의1을 차지하는 무슬림을 적으로 묘사하였다. 1989년 2월, 밀로세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거의 절반을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인구의 90%가 알바니아 민족인 코소보는 심한 억압을 받았다. 대규모 시위에 의해서
참고 자료
인권과 국제정치, 잭 도널리 지음, 박정원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