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델링 사례조사 - 인천중구 도심의 재생
- 최초 등록일
- 2009.11.08
- 최종 저작일
-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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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리모델링 사례조사 - 인천중구 도심의 재생
목차
Ⅰ. 인천 중구의 역사적·문화적 특성
1. 인천의 변천과정
(1) 개항과 외국인 거류지역 형성
(2) 일제 강점기
(3) 해방과 한국전쟁
2. 건축적 특성
(1)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계획
(2) 인천 중구 근대건축물의 양상
(3) 인천 중구 근대건축물 현황
Ⅱ. 인천 구도심의 재생
1. 근대건축의 가치보존과 시대적 요구
2. 인천 구도심의 재생 방향
(1) 인천 구도심의 재생 배경
(2) 인천 구도심의 재생 방향
3. 전략 지역 개발
(1)신포 문화 거리 조성
(2)박물관 거리 조성
(3)예촌 조성 계획
(4)차이나타운 조성
Ⅲ. 결론
본문내용
Ⅰ.인천 중구의 역사적·문화적 특성
1. 인천의 변천과정
개항전의 제물포
(1) 개항과 외국인 거류지역 형성
인천시가지계획구역가로망도
인천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 이후부터였을 것으로 보여 진다. 시내 학익동, 주안동, 문학동 등에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어 청동기시대에는 부족세력이 자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헌상으로는 삼국사기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의하면 인천은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에 속하며 미추홀이 있으며, 고구려시대에는 매소홀현이 설치되었었다. 인천광역시 중구 일대의 해안은 과거 제물포라 불리던 곳으로, 1876년(고종13년)에 맺어진 강화도조약에 의하여 부산, 원산과 함께 개항된 역사적 장소이다. 이 지역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의 관문으로서의 위치적 특성과, 비교적 수심이 깊고 섬들로 둘러 쌓여 있어 파도가 적으며, 조수간만의 차가 서해안 다른 지역에 비해 적기 때문에 대형 항구의 입지가 가능하다는 지형적 특성으로 인하여 끊임없이 개항 요구를 받아 왔으며, 1883년 9월에 ‘조선국인천구조계약서’의 체결에 따라 현재의 관동, 중앙동 및 해안동 일대에 약 7,000평의 규모로 일본조계가 설정되면서 치외법권적인 성격의 집단 외국인 거류지역이 이 지역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듬해인 1884년 4월에는 청국이 현 선린동 일대에 약 5,000평 규모의 조계를 설정하였으며, 동년 10월에는 독일, 러시아, 영국, 미국 등 서구 각국이 현 자유공원을 중심으로 약 14만평의 방대한 지역에 공동으로 조계를 설정하였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은 근대여명기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의 현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설정된 조계는 지금의 구도심지역 대부분에 해당하며,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목적으로 다양한 용도의 건축물 및 시가지가 건설되면서 한적한 어항이었던 제물포는 그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이국적인 색채의 근대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