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복원사업을 간략히 소개 후 그 후의 문제점과 정책목표를 벗어난 결과에 대해 조사했다.
목차
1. 서론
1) 청계천이란?
2) 청계천복원사업의 의미와 배경
2. 본론
1) 청계천 복원사업 후의 문제점
가. 가든파이브(동남권유통단지) - ‘청계천신화’ 붕괴의 시작
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다. 복원공사 중 교통대책의 미흡
3. 마치며
본문내용
2학기에 듣게 된 ‘정부와 시민참여’, 오리엔테이션 때 행정학과목이라고 하신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수업에 참여하다보니 이름그대로 정부, 시민, 비국가 행위체, 이익집단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관계를 맺어가는 상황에 대해 배우는 과목이라는 것을 느꼈으며 정말로 우리주변엔 고개를 한 바퀴만 돌려도 찾을 수 있을 만큼 정책이 많다는 걸 알았다. 이 레포트는 정부가 펼치는 수많은 정책 중에 실패를 한 사례를 쓰게 됐다. 고심 끝에 청계천복원사업과 그 후에 대해서 논해보기로 했으며 성공-실패로 양분화하기보다 본 사업의 역기능에 중점을 두고 연구해 보려 한다. 우선 청계천복원사업의 내용부터 간략하게 살펴보고 그 정책의 이득과 손실을 알아보고자 한다.
2. 서 론
1) 청계천이란?
청계천이란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구와 중구와의 경계를 흐르는 하천이며 길이는10.84km이며, 유역면적은 59.83㎢이다. 북악산·인왕산·남산 등으로 둘러싸인 서울 분지의 모든 물이 여기에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쳐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빠진다. 본래의 명칭은 `개천`이었다.
조선왕조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당시 청계천은 자연하천 그대로여서 홍수가 나면 민가가 침수되는 물난리를 일으켰고, 평시에는 오수가 괴어 매우 불결하였는데, 제3대 태종이 개거공사를 벌여 처음으로 치수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후 영조 때에는 유로변경 등 본격적인 개천사업을 시행하였다. 이 공사로서 내의 흐름이 비로소 직선화하였다. 순조·고종 때에도 준설공사는 계속되었는데 이 개천에 놓인 다리는 수표교 · 오간수교 · 광교 · 관수교 등 모두 24개가 있었다. 국권피탈 후 일제강점기 초(이때에 청계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에는 근대적 도시계획의 성격을 띤 대대적인 준설공사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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