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상품생산의 전개와 그 영향
(1) 상품생산의 전개
(2) 민변(民變)ㆍ항조(抗租)ㆍ노변(奴變)
본문내용
세계의 역사학계에서는 송대(宋代)로부터 아편전쟁 이전의 청대(淸代) 중엽(10세기 중엽~19세기 중엽)까지의 900여년간을 기본적으로 동질적인 사회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또 한 편, 위와 같은 기본전제는 인정하면서도 명말(明末)ㆍ청초(淸初)의 시기(16세기~18세기)는 하나의 ‘역사적인 획기(劃期)’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1960년대 이래 대두되기 시작하여 금일에는 거의 공통된 인식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토지제도(지주제)와 부ㆍ역제도의 변화, 사회구조의 변화, 상품생산의 전개 등 세 가지 측면의 변화가 동시에 진행되었고, 그 때가 마침 왕조교체기(王朝交替期)와 중첩된다는 의미에서 ‘명말ㆍ청초 획기론(明末ㆍ淸初 劃期論)’이 나타난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상의 여러 측면을 고려하면서 향촌질서의 재편을 중심으로 한 사회구조의 변화 측면, 인구이동과 인구분포의 재편과정에서 나타난 경제구조의 재편적 측면, 강남지방 직물업의 내용과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ㆍ역사적 성격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분석ㆍ정리해 보겠다.
1. 향촌질서의 해체와 재편
(1) 이갑제(里甲制) 질서의 해체
명조는 향촌지배를 위한 기본조직으로서 이갑제(里甲制)를 시행하였다. 명조는 이갑제질서를 기반으로 하여 사회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1400년대 중엽(명 중기~말기)에 점차로 이갑제질서가 변질ㆍ해체되어 갔다. 그런데도 명조의 재정규모는 계속 확대되고, 국가재정과 관리들의 은(銀)에 대한 수요가 증대되어 (명초에는 비교적 가벼웠던) 부ㆍ역이 점차 증가하고 은납화(銀納化)되는 등 농민의 부담은 갈수록 무거워졌다.
그런데 또 한편, 명초부터 향촌에 존재하던 극소수(0.15% 정도)의 특권층이 15세기 중엽에는 전 인구의 0.37%로 증가하였다. 이들은 토지를 겸병하면서도 국가로부터 받은 우면특권과 사회적 영향력을 이용하여 오히려 부ㆍ역을 기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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