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4. 민족문학론의 등장
조선후기에 이르러 ‘화(華)’의 척도로 평가되던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등장하자 화이(華夷)의 구분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견해가 대립되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들어서서 중세보편주의를 비판하는 민족주의가 등장해 문제가 더욱 복잡해졌다.
국권을 장악한 쪽에서는 ‘이’에 지나지 않는 청나라를 배격하고 중국에서는 사라진 ‘화’를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북벌(北伐)의 논리를 내세워 지배체제 옹호의 명분으로 삼았다. 한편, 청나라를 ‘화’로 인정하고 배움의 대상으로 삼자는 북학(北學)노선을 주장한 비판세력은 화이론을 완화시키고 청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를 근대로 순행시키는 길을 찾아 민족문화에 대한 자각을 심화시키고 민족문학의 가치를 드높였다.
허균(許筠, 1569~1618)은 민족문학 인식에서도 선구자 노릇을 했다. 그는 <성수시화(惺搜詩話)>에서 정철의 가사를 들어 국문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속구(俗謳)라고 일컬은 정철의 가사 가운데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장진주(將進酒)>는 맑고 장엄한 기품을 갖추어서 들을 만하다고 했다.
이만부(李萬敷, 1664~1732)는 중국을 따르려고 하지 말고 자가의사정신(自家意思精神)을 가져야 한다고 말해 민족의식에 해당하는 말을 처음 사용한 의의를 지닌다.
조귀명(趙龜命, 1693~1737)은 중국의 옛 것을 답습해거 비슷하게 되려고 하는 어리석은 풍조에서 벗어나 말과 글의 불일치에서 빚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문학의 독자적인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비교문화론의 관점을 마련해 위의 주장을 발전시켰으며 문화적인 상대주의를 중국문화와 우리문화, 한문학과 국어문학의 관계를 살피는데 적용해 중국문화 추종과 한문학 모방을 나무랐다.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사람의 마음이 입에서 나오면 말이 되고 말이 절주(節奏)를 가지면 가시문부(歌詩文賦)가 된다. 여러 나라 말이 같지 아니하나 그 나라 말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말에 가락을 붙인다면 천지와 귀신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 그것은 중국말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고 하며 형식의 특징에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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