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과 관련 서적과 신문 조사
- 최초 등록일
- 2009.06.18
- 최종 저작일
- 2008.09
- 1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500원
소개글
국문과 관련 서적과 신문 조사
한성순보,독립신문,태서문예신보,천희당,시화서유견문,해에게서 소년에게,혈의누,천로역정,금수회의록, 자유종
목차
1. 《한성순보》
2. 《독닙신문》
3. 《한성신보》
4. 《태서문예신보》
5. 『천희당시화』
6. 『서유견문』
7. 『천로역정』
8. 『海에게서 少年에게』
9. 『血의 淚』
10. 『금수회의록』
11. 『자유종』
12. 『무정』
본문내용
1. 《한성순보》
한성순보(漢城旬報)
1883년(고종 20) 10월 1일 창간된 신문. 근대적인 형태의 신문의 효시(嚆矢)로서, 통리아문(統理衙門)에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고 여기서 순간잡지의 체재로 발간한 것인데, 관보9官報)의 성격을 띠었다.
본래 국한문체(國漢文體)의 신문으 목표로 하였으나, 활자의 준비 관계와 수구파(守舊派)의 반대운동으로 결국 순한문으로 표기했다.
한국 최초의 신문. 고종(高宗) 20년(1883) 10월 1일에 제1호를 발간하였다. 개화사상의 각성으로 설치한 박문국(博文局)과 함께 창간된 것인 바, 내용은 일종의 관보(官報)로서 월 3회 발행의 순간(旬刊)이었다. 주관자는 일본인 이노우에(井上甬五郞).
신문의 목적은 외국 상황의 번역 기재를 목적으로 하였으며, 순한문 전용이었다. 1884년 3월 관보에 청병(淸兵)의 폭행사건을 게재하였다가 청국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결국 폐간을 당하게 되었다. 그 해에 다시 속간되었다가 동년 10월에 일어난 갑신정변 이후 수구파(守舊派)들의 습격을 받아 북문국이 파괴되자, 정간(停刊)되었다.
다음해 김윤식(金允植) 등이 박문국을 교동(校洞)으로 옮겨 [한성순보] 대신 [한성주보(漢城週報)]를 발간하였다.
1883년(고종 20) 10월 1일에 창간된 한국 근대신문의 효시(嚆矢). 조선정부는 같은 해 8월 17일 정부 내에 출판사업을 위한 박문국(博文局)을 설치하고 일본으로부터 인쇄기계와 신문용지를 구입하여 순간(旬刊)잡지 형태의 관보로 「한성순보」를 간행하였다.
체제는 19×26.5 cm 크기의 전단제(全段制)로 매호 24면을 발행하였으며, 표제와 본문 모두 4호 활자를 썼다. 온건 개화파의 주도로 간행된 「한성순보」는 본래 국한문체(國漢文體) 혼용을 꾀하였으나 수구파(守舊派)의 방해와 활자의 미미 등으로 순한문으로 40호 이상을 발행하다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로 84년 12월 4일 수구파 군중들의 습격을 받아 박문국 건물이 불타, 창간 14개월만에 폐간되었다.
1883년(고종 20)에 창간되었던 순간(旬刊: 열흘 간격으로 발행하는 발행물) 신문.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이다. 1883년 10월 1일(음력) 서울 저동(苧洞: 지금의 을지로2가)의 통리아문(統理衙門) 박문국(博文局)에서 발행한 월 3회 발간된 순보로, 매월 1일자로 간행되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