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20년대에 신여성, ‘신남성’으로 불리던 한국의 지식인 계층이 3․1운동이 실패로 끝난 암울한 시기에 연애열풍에 사로잡혔던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2. 부르주아 신여성, 사회주의 신여성 모두 기존의 성도덕에 반기를 들고 자유연애․ 자유결혼․ 자유이혼을 자유분방하게 실천하였다. 그런데 사회주의 신여성들이 부르주아 신여성에 비하여 사회적인 비난을 덜 받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자.
3. 자신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삶을 조사해보자.
4. 변화하는 성관념이 현대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자.
본문내용
1. 1920년대에 신여성, ‘신남성’으로 불리던 한국의 지식인 계층이 3․1운동이 실패로 끝난 암울한 시기에 연애열풍에 사로잡혔던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 신여성의 의미를 살펴보면 특별히 규정된 것은 없었지만, “신식 교육의 중등정도, 즉 그 고등보통학교 정도를 마친 여자를 신여성, 그렇지 못한 여자를 구여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라는 주요섭의 지적이 당시의 신여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 1920년대에 절정에 이른 신여성은 정신적인 면에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 신체에도 작용하여 개성적인 의복과 장신구가 신여성의 상징이 되어 전통적인 여성의 행동거지를 바꾸어 놓았다.
1920년대 초 일본을 통해 유입된 입센, 엘렌케이, 콜론타이 등의 여성해방사상을 접했던 한국의 신여성들은, 식민지 시대의 사회적인 역할에 대한 고민 보다는, 남녀평등, 자유연애와 같은 개인적인 욕망의 실현을 중시하게 되었다. 즉, 개성과 이성을 추구하게되며 개인주의적 지향이 강해졌다는 점에서 전통과 인습에 도전하는 급진주의자였던 것이다.
또한 3·1운동 이후 여성의 높아진 향학열에 힘입어 근대교육의 수혜를 받은 여학생 그룹이 하나의 사회세력으로서 1920년대 신여성의 실체였다. 3·1운동은 민족항거로서 정치적 각성을 불러일으킨 커다란 사건이었다. 이 시기에 유행된 연애열풍은 3·1운동이 실패로 끝난 이후 정치적 열정이 꺽인 식민지 한국의 현실을 외면한 자리에서 생겨난 일종의 환각이었다. 당시 자유연애가 시대사조이기는 하였지만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는 각자의 삶속에서 풀어야 할 문제였으므로 신여성, 신남성 이라고 해서 모두 자유연애에 동의 한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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