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9.06.02
- 최종 저작일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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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숭례문에 대한 내용과 감상
목차
Ⅰ 머리말
Ⅱ 본문
1. 미술품해석
1) 숭례문 모습
2) 숭례문의 위치
3) 숭례문의 역사
4) 남대문과 숭례문
5) 숭례문의 이름의 유래
6) 숭례문 화재
7) 숭례문의 형태와 건축사적 중요성
2. 나의감상
Ⅲ 맺음말
Ⅳ 참고자료
본문내용
Ⅰ 머리말
서울의 상징인 숭례문은 문이 있는 자리가 한양의 남쪽이기 때문에 남대문이라고도 불리며600년 동안 서울을 지켜오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였지만, 지금 현재는 현판만 남긴 채 한 줌 재로 변해 버렸다. 우리 국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가치이자 보물이자 자긍심인 숭례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Ⅱ 본문
1. 미술품에 대한 해설
1) 숭례문 모습
2) 숭례문의 위치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3) 숭례문의 역사
서울 숭례문은 조선시대 서울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ㆍ수리하는 과정에서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62년 숭례문을 중수할 때 나온 숭례문 상량일자를 묵서한 대들보가 3개 발견되었다. 첫째는 태조 때 창건 당시의 대들보요, 둘째는 세종 때 개수시의 대들보요, 셋째는 성종 때 개수시의 대들보이다. 창건 당시인 태조 때의 대들보에는 "홍무이십구년병자시월초지일상량(洪武二十九年丙子十月初之日上樑)"이라고 묵서되어 있으니, 홍무 29년은 태조 5년(1396)에 해당하므로 이 해 10월6일에 상량하고 2년 후인 태조 7년 2월 8일에 준공하였다. 따라서 숭례문은 태조5년에 창건하였고 2년 후에 다시 고쳐지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4년(1422) 도성을 개축할 때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고, 세종 30년(1448)에 개축하였다. 이때 개축한 이유는 숭례문이 기울거나 퇴락하여 개축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지대가 낮아서 볼품이 없고 또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에 구애되어 숭례문의 지대를 높여서 남산과 인왕산의 산맥에 연결시켜 경복궁이 포국을 아늑하게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참고 자료
윤돌, 『1000원으로 시작하는 서울 역사문화여행』, 황금부엉이, 2006
이광표,『손안의 박물관』, 효형출판, 2006
서형,『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효형출판, 2004
백유선,『한국사 콘서트』, 두리미디어, 2008
서울숭례문-서울문화재 http://sca.visitseou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