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가로서의 루터
1519년 10월 31일 루터는 면죄부에 반대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내건다. 95개 조항은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 그러나 그 조항들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면죄부에 대한 그의 공격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바울적인 신념에서 발생했다. 그는 면죄부를 유해하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순진한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이 그의 세대의 기독교의 가르침, 즉 외적인 행위, 형식, 대가를 지불, ‘선행’에 의해서 하나님과 화해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제안하는 가르침과 함께 내적으로 잘못된 외면적이고 가증스런 커다란 증상으로 보았다. 루터는 면죄부를 공격하지 않았고 그것에 의하여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에 도달하지 않았다. 그는 특별한 면죄부를 비판하기 위해서 이미 인정된 칭의의 교리를 적용했다.
한편, 루터는 면죄부 판매 등 당시 교회가 가르치는 잘못된 주장들에 대해 학문적인 토론을 열 계획이었지 교회개혁이라는 세계사적인 변혁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95개 반박문이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독일어가 아니라 식자들만이 알 수 있는 라틴어로 작성되었던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루터는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6일까지 라이프찌히(Leipzig)에서 엑크와 논쟁을 벌였다. 여기서 엑크는 교황에게 루터의 파문을 건의했다. 1520년 루터는 개혁적인 논문들을 발표하며 카톨릭의 잘못된 것들을 성서의 원리에서 비판하고 배격한다. 1521년 1월 루터의 파문 칙서가 발표되었으나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의 위치는 굳건했고, 그의 행동은 정당한 근거가 있었다. “나는 여기에 서 있다. 그러므로 나는 달리 행동할 수가 없다.”
루터가 1546년에 죽었을 때, 그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루터의 적들까지 모든 유럽은 역사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 인류의 드라마에서 퇴장하는 모습을 인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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