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일요일이후 러시아상황(빠쫌낀호반란,스똘르이삔농업개혁)
- 최초 등록일
- 2000.12.16
- 최종 저작일
- 20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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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차 례 ♣
Ⅰ. 피의 일요일 이 후의 러시아 상황
1.전함 ‘뽀쬼낀’호의 반란
2. 전 러시아의 동맹파업
3. 12월 무장봉기
4. 혁명의 실패와 스똘르이삔의 등장
※ 연 혁 표
Ⅱ. 스똘르이삔의 농업개혁
1. 스똘르이삔 그는 누구인가?
1) 스똘르이삔의 사상
2) 스똘르이삔의 새로운 견해
3) 스똘르이삔의 先 平溫, 後 改革 정책(“화해”, “개혁” 정책)
① 스똘르이삔의 화해정책
② 스똘르이삔의 개혁정책
2. 스똘르이삔의 농업개혁
1) 원 인
2) 전 개
3) 결 과
4) 의 의
5) 스똘르이삔 개혁의 한계
Ⅲ. 국가두마(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дума)
1. 러시아 최초, 입헌 군주제의 시도
① 제 1대 두마
② 제 2대 두마
③ 선거법 개정
④ 제 3.4대 두마
◎ 발표를 마치면서…
Ⅳ. 참 고 자 료
Ⅳ. 참 고 자 료
♠ 용 어 설 명 ♠
1. 사회혁명당:
2.카데트
3.10월당
5.집산주의
6.삼부회
♠ 사 진 자 료 ♠
◀ 니꼴라이 2세
▲ 당시 민중들의 모습
◀ 스똘르이삔
▲ 의회건물
본문내용
스똘르이삔은 러시아에서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을 무렵, 혁명을 가혹하게 탄압하며 자신의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스똘르이삔의 농업개혁과 국가두마는 입헌 군주제 하의 근대 국가의 틀과 부르주아적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해가는 과정에서 숱한 모순을 안고 불연한 항해를 해가는 러시아 역사를 정치적인 측면에서 살펴 보자면, 입헌 군주제로의 변혁과 두마의 등장은 투표를 통해 참정권을 행사하는 의회 정치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혁명의 열기가 짜리즘의 완전한 타도로 나아가는 과정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목소리를 국회를 통해 행사하려는 인민들의 소망을 국회 해산과 선거법 개악을 통한 친정부적 국회 구성을 통해 좌절시키고 일방적으로 국가두마를 지배한 행위는 결국 혁명의 잠재적 씨앗을 키웠다고 볼 수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스똘르이삔의 농업 개혁은 몰락해 가는 귀족, 대지주층을 권력 지지 기반으로 하기 보다는 중,소 자영농을 육성해 그들을 바탕으로 확고한 지지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중.소지주의 육성을 통한 농업부르주아층(부농)을 광범위하게 형성시켰지만 하층 농민들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토지로는 생계를 꾸려갈 수 없어 땅을 부농에게 팔고는 부노의 날품팔이가 되든지 아니면 도시로 일을 하러 떠났다. 황실측과 귀족, 관료층과의 대립으로 인해 농업개혁 정책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이 역시 혁명의 잠재적 씨앗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진이 많이 첨가됨-----------------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