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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정보
ㆍ발행기관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ㆍ수록지정보 : 남명학연구 / 19권
ㆍ저자명 : 李鍾黙
ㆍ저자명 : 李鍾黙
목차
1. 서 론2. 講學의 도구로서의 詩學
3. 山水를 매개한 修養의 詩學
4. 결론을 대신하여
한국어 초록
본고는 조선 말기 경상우도의 유학을 대표하는 재야학자 后山許愈(1833-1904) 의 한시에 대한 연구다. 朱子와 退溪의 학문을 잇는 데 평생을 진력한 학자였으므 로, 詩學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젊은 시절 허유는 문장 공부 에 주력하였고, 특히 韓愈의 글을 좋아하였다. ‘愈’라는 이름 자체를 한유에서 가 져 왔거니와 退而역시 한유의 자 退之에서 한 글자를 바꾼 것이다. 별호 南藜子 는 한유의 호 蒼藜에서 가져온 것인데, 남쪽 땅의 한유라는 뜻이다. 그러나 허유는 서른 살 무렵 文學을 멀리하고 儒學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李 震相을 스승으로 삼아 主理說을 배우고 깨우쳐 李震相학문의 핵심인 太極과 動 靜, 人心의 主資, 人物의 性凡, 華夷와 王伯의 구분 등을 탐구하였다. 이것이 朱 子와 退溪의 전해지지 않는 학문의 비결이 이에 있다고 여겨 평생 이를 계승하고 자 하였다. 철저하게 理를 중시한 허유에게 문학이 중요하지 않거니와 문학을 하 더라도 역시 理를 主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하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허 유는 문학 자체가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李白, 杜甫, 蘇軾등의 시도 학문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小學과 大學이나 열심히 읽어라 한 것이다. 다만 한시는 당시 사족들에게 생활의 일부였기 때문에 배우지 않을 수 없는 현실 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학생들이 여름철을 이용하여 일부의 시를 읽는 것은 무 방하다고 하였다. 李白의 古風五十九首와 杜甫의 北征을 긍정하고 특히 韓 愈의 南山과 朱子의 齋居感興은 필독해야 할 시라 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허유는 한시를 강학의 수단으로 여겼다. 朱子의 시를 즐겨 읽었지만, 주자의 시를 시로 본 것이 아니라, 시를 통해 주자의 뜻을 파악하려 한 것이니, 허유에게 있어 시학은 心學의 일부였다. 허유는 鄭逑등 東方先賢의 시 역시 강학의 도구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논리에서 허유는 벗들이나 후학들에게 시 를 통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히고 또 강학을 권려하였다. 허유는 강학의 여 가에 산수 유람을 즐겼고 그 흥을 청신하고 담박하게 발산하였는데, 그 전범을 陶 淵明에서 찾았다. 그러나 문학보다 학문을 우선한 허유이기에, 시를 강학의 도구로 생각하였던 것처럼 山水역시 수양의 자료나 理를 확인할 수 있는 매체로 삼았다. 허유는 19세기 내우외환의 복잡다단한 시대를 살아간 산림의 학자다. 세상이 복 잡하기에 오히려 心卽理라는 하나의 원리만을 고집하였다. 허유가 이 땅을 떠난 지 이제 100년이 되었다. 세상은 그 때보다 더욱 복잡하다. 복잡할수록 하나의 원 리만을 주장한 허유의 고지식이 오히려 현대 학자에게 경종이 될 수 있다.영어 초록
This paper studies the poems in Chinese by Husan, Heo-yu(許愈, 1833-1904) who was the scholar out of power, representing the Confucianism in the right area of Kyeongsang province. He was not interested in poetics because he was a scholar who succeeded the tradition of the learning of Chuhsi(朱子) and Toege(退溪). However, he concentrated his energies on writings, specially the writings of Han-yu. The letter ‘yu' in his name was from ‘Han-yu(韓愈)' and his pen name ‘Toei(退而)' from ‘Toeji(退之)' which was the pen name of Han-yu. His another pen name, Namlyeoja was also named after Changlyeo, the pseudonym of Han-yu, which means the Han-yu in the southern area. However, Heo-yu began to devote himself to Confucianism, keeping away from literature about the time when he was thirty. He looked up to Yi Jin-sang as a preceptor to learn the Confucian principle and his theory. He tried to succeed the learning of Yi Jin-sang all his life, thinking that his theory included the secret of learning, which was not found in Chuhsi and Toege. He attached importance to Li(Pattern, 理). Literature was the secondary one to him and furthermore, he thought that literature was not useful to learning. However, he argued that it would be all right that the students read the some poems in summer because the poems in Chinese were a required study as a part of life to Yangban class. He recommend Yi Baek's poem, Kop'ungosipsu and Dufu's Bukjeong, specially Namsan by Han-yu and Jaekeo'gamhung by Chuhsi. However, he basically took poems in Chinese as a means of study. The poetics was one part of ‘Simhak(School of Mind, 心學)' to Heo-yu, because he focused on grasping the meaning of poems by Chuhsi, not taking poems as a literary artifact. Heo-yu enjoyed nature in his spare time and expressed his pleasure in a fresh and simple way as Do Yeon-myeong did. However, he also took the nature as a medium of self-cultivation or of discovering the ‘Li(Pattern, 理)'. Heo-yu was a scholar who lived in a turmoil due to the domestic discord of the nineteenth century, persisting the only principle that the Sim(mind, 心) is equal to the Li(pattern, 理). It is 100 years since Heo-yu passed away. The inflexibility of Heo-yu is warning to the modern scholars living in a complicated society.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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